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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Oct 02. 2019

일상, 고즈넉함을 마주치다

강원도 등명락가사

"어느 날 계획에 없던 순간에 완벽한 고즈넉함을 마주치고 나서야 수많은 날들 어떤 순간에도 휴식을 취했던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름의 끝자락 어느 날, 강원도 정동진 주변 등명락가사라는 사찰을 우연히 방문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가족 여행 중 어머니가 한 번 들러보고 싶다는 말에 즉흥적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어머니는 먼저 올라가 사찰에서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나는 여행의 피로를 풀 겸 잠시 차에서 눈을 붙이고 쉬었다. 그렇게 30분가량이 흘렀을 무렵 잠도 깨고 온 김에 천천히 둘러보잔 생각으로 무거운 몸을 움직여 사찰로 향했다. 잠이 덜 깨 조금 멍한 상태로 살짝 가파른 진입로를 오르려니 숨도 차고 차에 있을 걸 금세 후회가 밀려왔지만, 느릿느릿 진입로 주변에 흐드러진 꽃과 숲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여름의 끄트머리와 가을의 초입에 걸친 산길은 매미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잠자리가 날아다녔고, 푸르른 녹송과 코스모스가 한 데 어우러져 입체적이고 풍요로웠다. 가득히 채워진 자연 속에 위치한 사찰도 자연의 일부인 양 자연스레 위화감 없이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요했지만 가득 차 있었고, 이쁘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자연스레 배경음처럼 울리는 매미 울음소리와 걸음마다 따라오는 굵은 자갈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념무상의 상태로 빠져 들어 걷게 되었다.

그렇게 사찰 가운데 위치한 석탑에 이르렀을 때 문득 적막하고 고요한 공기가 주변을 감싸 왔다. 내 주변의 공기 텅 빈 듯, 매미 울음소리조차 이 고요함의 일부분인 것처럼 소음 없는 소리 사이로 내 안의 소란마저 빨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고민과 번뇌마저 이 고요함에 묻혀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린 듯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으며 찰나지만 평온을 엿볼 수 있었다.
고즈넉함이란 어떤 의미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 곳이 언제나 이렇지는 않겠지만 오후 5시 노을이 지기 전 그 날 그때의 그 순간은 너무도 강렬한 고요함으로 내 안에 남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꽤 많은 사찰을 다녀봤다. 그래서일까 사찰 특유의 분위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종교시설 특유의 경건함과 웅장함, 왠지 사람을 위축시키는 그 특유의 사찰스러움은 사찰에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주변을 채우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유명한 사찰이나 신도가 많은 사찰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불경과 노래가 반복되고, 관광객들이 드나들면서 소란스러워졌다. 종교 시설이다 보니 사람들은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사찰스러움은 퇴색하고 소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이 절대적인 고요함을 품은 이 사찰의 분위기가 익숙하면서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가웠다.

되돌아보면 중학교 무렵 자주 다니던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했던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사찰이 이랬던 것 같다. 등산로 입구다 보니 사람이 무수히도 많이 지나다니던 작은 사찰이었지만 그 사찰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 사찰의 공기와 산의 공기가 뒤섞여 편안함과 안정감에 잠시나마 평화를 느꼈던 것 같다. 사찰 앞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소음조차 이 사찰의 일부인 것처럼 고요했고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10대 사춘기 시절의 마음에 평온을 담을 수 있었다.

20대 중반 혼자서 여행을 다니던 중 밤늦은 시간에 머물 곳이 없어 들렀던 한 사찰에서도 이런 고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사찰에서는 밤을 지새우기만 했기에 낮의 모습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늦은 밤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등지고 모든 것이 가라앉은 사찰이 주는 감흥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평화로움이었다. 젊은 혈기의 방황 속에서 어지러운 감정들을 그렇게 별을 보며 갈무리했었던 것 같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 잠시도 시간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고 핸드폰을 손에 쥐고 온갖 자극적인 글, 동영상, SNS 등으로 시간의 틈을 채우고 있다. 마음에는 바늘 틈만큼의 여유도 없이 분초를 다투며 자의 반 타의 반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끝없는 자극을 내 안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던 것만큼 이 극단적인 일상에서 벗어나서 한순간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갈망 역시 마음 한 편에 자라고 있었다. 그런 순간 예고 없이 마주친 고요 속에 들어선 것만으로 몸과 마음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던 삶의 치열함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고즈넉함이란 이름의 평온과 평화를 다시 마주친 것만으로 위로받는 것 같았다.

사찰 안의 정자에 앉아 정동 방향의 바다와 하늘을 막연히 바라보니 몸도 마음도 파랗게 씻겨 나가는 것 같다. 이 여행의 끝에는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와 소란스러움 속으로의 투신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고즈넉함에 오롯이 나를 맡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휴식과 행복 그 자체이기에 걱정은 뒤로 밀어놓았다.

10여 년에 한 번씩 이런 평온한 순간이 내게 찾아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찾으라는 하늘의 뜻이겠지 싶다. 아마도 삶에서 소란스러움이 너무 차오르면 언젠가 한 번은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그때까지 이 고즈넉함이 떠나지 않고 기다려주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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