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시간 May 22. 2023

아이의 의미

아이와 워터파크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온날, 집에 오자마자 스르륵 잠에 빠진 아이는 밖이 어스름해질 때까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는 혼자 물놀이용품을 정리하고, 손빨래를 시작하고, 캐리어의 물품을 제자리에 찾아둔다. 밀린 집안일에 다음날 먹어야 하는 음식까지 준비하며 혹여 자그마한 소리에 깰까 몸을 조심스레 움직인다. 결국 달그락 소리에 깬 아이와 놀아주고 저녁을 먹는다.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읽으며 잠에 빠진다. 그러다 깨어있음과 잠 사이의 몽롱함 속에서 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굳이 이혼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렇게 온전히 책임지는 아니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이 내 인생에 더 있을까? 결혼을 하기 전,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를 낳기 전에는 세상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도 없었고 세상은 거의 내가 예상한 나의 뜻대로 흘러갔다. 약간은 부족한 듯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라며 그다지 큰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성취정도만큼만 적당히 욕심을 내며 그것을 이뤄나가는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 위주로 돌아가던 나의 세상이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더니 와르르 무너지고 중심에 아이가 등장했다. 2시간마다 30분 수유를 하고 30분 트림을 시키고 나면 나머지 1시간을 앉은 채로 잠을 자는 생활을 3달 정도 반복하고 나자 이유식이 기다렸고, 이유식이 끝나자 유아식이 기다렸다. 의식주 중에 식에만 이 정도의 노동력이 드니  다른 것은 말하기조차 고되다. 나의 인생과 젊음을 탈탈 털어 아이에게 갈아 넣고 쥐어짜면, 딱 그만큼 아이가 조금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손짓 한 번에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기특해하며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내가 들인 품에 대한 품삯은 이미 생각조차 없다. 내 안의 사랑의 감정을 싹싹 긁어 모두 퍼다 아이에게 떠주고 싶다. 꼭 붙어 앉아 볼을 비비며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엄마, 내일 저녁은 내가 알아서 친구랑 사 먹을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 앞에서 이런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내 시간을, 나 혼자 홀로 고요히 있는 시간을 그리워한 적도 있지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 앞에서 이 찰나의 시간이 곧 끝나감을 느낀다.


당당하기만 했던 과거의 나는 현재의 삶과 세상 앞에서 겸허해짐을 느낀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아이가 사회관계를 맺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나의 의지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겸허해진다. 내손으로 항상 해결했던 내 주변의 문제들이 내 뜻대로 정리되지 않을 때의 좌절감이란. 아이는 이렇게 내가 마주하는 모든 일 앞에서 좀 더 겸손해지라고 내게 왔나 보다.


다시 돌아가서 아이와의 만남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어떨까? 결국엔 지금 이 고된 현실을 뒤로 두고 이 이름을 가진 이 아이를 만나기로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망설임은 추호도 없겠지. 무한한 사랑과, 겸손과, 희망과 기쁨을 모두 가르쳐준 아이를 다시 품에 쏙 앉고 아이의 숨소리에 집중하겠지. 내 인생에서 아이가 없었다면 오만방자함이 끝이 없는 '나'만 남아있을 것을 알기에 이 모든 것을 가르쳐준 아이에게 고마워지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살 아이가 사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