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수라 Jan 25. 2022

가로등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일찍 끝난 살림에 허리를 펴고 차 한 잔을 만든다. 오랜 시간 불면증으로 고통받아온 나는 저녁이면 캐모마일 한잔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차 한잔을 들고 베란다를 내려다보는데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남녀가 눈에 띈다. 마침 눈이 내려 하얀 바닥을 비추는  불빛이 더욱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언니와 나이 터울이 많이 져 혼자 크다시피 한 나는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였다. 맞벌이하던 엄마 아빠를 대신해 낮에는 할머니에의 보살핌을 받으며 퇴근하는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는 했다. 엄마가 오는 시간이 되면 기다리지 못하고 골목 초입까지 내려가 가로등 밑을 서성거렸다. 그때쯤이면 집집마다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칼칼한 찌개와 생선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길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다. 골목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났다 자기 집 대문으로 쏙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밥 먹으라는 할머니의 부름에도 엄마와 같이 먹겠다며 뻗대기를 하기 일쑤였다.


신혼집 골목 초입에도 가로등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드문드문 서 있어 운치를 더했던 것 같다. 저녁을 지어놓고 곧 퇴근할 남편을 맞이하러 골목으로 나간다. 집을 간나와 멀리서 비추는 주황빛 불빛을 바라보면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에 맞춰 나의 눈도 커졌다 작아진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지루해지면 가로등과 집 사이를 오가며 기다림의 설렘을 만끽한다. 오가는 와중에도 가로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렘이 초조함으로 변할 때쯤 바람처럼 가로등 밑을 지나는 남편을 발견한다. 남편은 잠깐 사이 차가워진 나의 손을 꼭 쥐어 주머니에 넣고는 집으로 이끈다.


멀리 있어 잘 보이는 것이 있다. 가로등 밑에 서 있으면 따뜻한 불빛에 마음이 빼앗기지만 정작 자신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과의 거리가 그립다. 옹기종기 붙어 앉아 서로에게 불어넣던 온기와 맞잡은 손이 아쉽다.


늦게까지 켜져 있는 텅 빈 가로등은 그리움과 사람의 온기가 묻어있다. 골목의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엄마의 품, 어린 시절의 추억, 신혼 때의 달콤함, 남편의 따뜻한 손, 그리고 기다림의 초조함과 설렘이 공존한다. 창으로 보이는 가로등에서 그리움의 내음이 발한다. 창을 열고 빛 속으로 코끝을 가져다 대본다.

작가의 이전글 그녀들의 생일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