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사랑 사이
내가 ‘사랑’에서 헷갈렸던 한 가지,
< ‘더 사랑으로 품어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집착인 것인가 아니면 사랑인 것인가 >
제제의 엄마역할을 하며 매일 밤 나를 참회하게 하는 마음이자, 하늘에 돌아간 나의 가족들과 나를 떠난 인연들에게 드는 마음이다.
누가 내게 말했었다.
“넌 결국 모든 사람에게 예쁨 받고 싶은거잖아” 라고.
혼란스러웠다. 난 정말 인정욕구, 버림받고 싶지 않은 생존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 ㅡ 이것 때문에 친절하고 다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거북하고 상처가 났어도 말하지 않고 일단 후퇴하고 나부터 되돌아보려는 태도가 이러한 욕구들 때문에 취한 방어기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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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6시 남천성당 산책하러 간김에 들은 강론에서 신부님이 그러셨다. ‘더 잘해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이 신앙인의 마음’이라고.
삶의 마지막 배웅 장소, 장례식에서 내가 들었던 마음은 늘 “더 잘 해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우리의 마지막엔 ‘더 사랑으로 품어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노력은 집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진심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에도 고통체와 에고와 함께 실수하고 실패하며 흔들거리고 그렇게 너와 공존하며 살아간다. 아픈 상처를 주기도 하고, 충만감에 넘치는 기쁨을 나누기도 하며 늘 진심으로 살아간다. 쉼표일 줄 알았지만 우리의 마침표가 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서는 <미안해 고마워 용서해 사랑해> 가 되고 싶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일 될 수 있는 순간이니 그저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서 ‘서로’는 무슨 의미였을까. 나와 너가 다르지 않으니 모든 이를 사랑하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서로’가 주는 단어의 의미는 손뼉을 치듯 내 사랑을 허락한 이들과 사랑하라는 의미도 담겼을지도 모른다. 받고 싶지 않은 사랑을 주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나만 사랑하는 것‘으로 욕심일 수 있으니 말이다.
용서, 나와너가 다르지 않음 ㅡ 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안다면 아마 신부님께서 불가능일 것이라고 했던 ’서로 사랑하라‘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런 곳이 ’천국‘이지 않을까.
#Breeze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