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시간이었다.
‘사라, 버스를 타다’ 읽고 인물, 사건, 배경을 바꾸어보는 활동이었다. 기존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요소를 살짝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기존의 것을 조금씩 바꾸다 보면 결국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축복 아닌 축복을 퍼부었다.(아. 오늘도 흥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데 거침이 없는 우리 반 아이들은 나의 오버에 또 신이 났다.(이 맛에 매일 오버하는 수업을 합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활동이었는데 또 일이 커졌다. 일을 크게 키운 우리 반 아이들의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인물의 성격 바꾸기) 사라의 성격을 난폭하게 바꾸어버린 어린이가 지은 작품명은 ‘금쪽이 사라’였다. 오은영 박사님의 등장은 덤이었다.
(사건 바꾸기) 사라가 겪은 로맨스로 이야기를 만든 어린이가 지은 작품명은 ‘사라, 결혼을 하다’였다. 두근두근한 고백 장면은 덤이었다.
(배경 바꾸기) 사라가 생활하는 학교 이야기를 만든 어린이가 지은 작품명은 ‘사라, 학교에 가다’였다. 학교폭력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걸 크러쉬는 덤이었다.
아이들은 미니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자고로 본인의 책을 홍보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개인 발표 시간을 주었다. 아이들은 이제 본인의 책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한두 명 아이들이 흥미롭게 시작하자 과잉경쟁이 시작되었다.
한 학생은 이야기를 잘 풀어내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설명을 딱! 멈춰버린다. 그리고는 '구독과 좋아요'하란다.(유튜브 광고 타이밍을 아는 듯)
어떤 학생은 순식간에 3권까지 만들어서 1+1+1이란다.(스피디한 필력이 정말 부럽다.)
어떤 학생은 자기 책 가격이 12,000원이란다. 애들이 안 산다니까 12,000원 빼기 12,000원이란다.(전무후무한 파격 세일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우리 반 똘똘이 현기가 한마디 한다.
“선생님, 이 문제를 만든 사람들이 이렇게 재미있게 활동하는 거를 상상했을까요?”
“응? 이 문제?”
“이 교과서에서 미니북 만들라고 우리한테 문제를 낸 거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은 수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을까요?”
“응?”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의 의도보다 우리가 훨씬 재미나게 수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선생님 진짜 재미있어요’라는 말을 넘어선 표현이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뜬금 없이 아이들에게 고백했다.
“얘들아, 사실은 선생님은 교과서 뒤에 이름이 나오고 싶었어.”
“교과서 뒤에 이름이 왜 나와요?”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 이름이 뒤에 쓰여있거든. 뒤에 봐봐.”
“아, 진짜 있네요. 선생님이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응.”
“그런데 왜 못했어요?”
“응. 실력도 부족하고, 아이도 키우느라고 못했지. 늘 아쉬움이 있었어. 그런데 너희들이 해 준 말에서 큰 용기를 얻었어.”
“무슨 말이요?”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말. 바로 그 말에서 선생님이 꼭 교과서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었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알려줘서 진짜 고마워.”
열정이 넘치던 젊은 날, 교과서 집필진이 되어보고 싶다는 어렴풋한 꿈이 있었다. 오늘 아이들이 먼지 쌓인 그 어렴풋한 꿈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이상을 이룬 사람이라는 감동을 전해주었다.
“선생님, 좋은 방법이 있어요.”
“뭔데?”
“저희가 교과서 뒤에 선생님 이름을 써줄게요! 그럼 되잖아요! 그럼 선생님 꿈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에 뿌듯해하며 경쟁적으로 교과서 뒤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네임펜, 매직. 모든 필기도구가 동원되었다. 모든 집필진을 부정하는 듯 x자를 그어버리고 오직 내 이름만 적은 학생도 있었다.
세계 최고의 유영미 선생님.
우주 최고의 유영미 선생님.
유영미 선생님. 잘 가르칩니다.
안구에 습기가 찼다.
아니 온몸에 습기가 찼다.
나는 촉촉해졌다.
(혹시 몰래 욕을 쓴 학생은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