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행발 쓰던 경험을 쥐어짜도 도저히 긍정의 말을 해 줄 수가 없어”
지난여름 토르 영화를 보고 나온 친한 선배 교사의 한 마디였다.
여기서 행발은 '행동발달상황'의 줄임말로 교사들이 성적처리를 할 때 자주 쓰는 단어다. 요즘 NEIS 시스템 상 공식용어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이다. 교직경력이 10년 이상된 교사들은 문장으로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표현하는 그것을 보통 ‘행발’ 또는 ‘쫑알이’라고 한다. 나는 여전히 ‘행발’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오늘도.
벌써 눈치챘겠지만 요즘 행발은 긍정의 집약체이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유명 연예인의 몇십 년 전 학교 성적표를 보면 ‘본인 주장이 강해 친구들과의 싸움이 잦음.’이나 ‘도벽이 있음.’ 등의 원색적인 표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면 행발은 도대체 언제부터 긍정의 집약체가 되었는가? 갑자기 그 역사가 궁금해진다.
(궁금하시죠? 도망은 가지 마시고요.)
학기 말, 학년 말이 되면 선생님들에게는 ‘성적처리’라는 과업이 주어진다. 물론 평가는 평소에 해 놓지만 그것을 NEIS 시스템에 입력하는 시기이다. 평소 학생의 학습태도나 수행평가에서 보여준 모습들을 세밀한 문장으로 풀어서 입력해야 한다. 이때 모든 교사는 작가가 된다.
약 18년 전만 해도 행발 입력이 힘들긴 했어도 솔직할 수 있었다. 학생의 잘하는 점, 부족한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런 성적표에 대하여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행발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평가 지침에는 행발을 긍정적인 관점으로 작성하라는 안내가 있었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긍정적인 아이는 긍정적으로 써주고, 부정적인 아이는 부정적으로 써줘야지 어떻게 부정적인 아이를 긍정적으로 써주는 거짓말을 하냐고 했다. 관리자들은 거짓말이 아니라 발전 가능성을 중심으로 기록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말은 쉽지요.) 교사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발전 가능성을 위주로 기록했다.(우리는 착한 족속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어떤 선생님께서 성적 입력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발전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성격 급한 관리자들은 뭐라도 얼른 써서 내라며 독촉했고, 선생님은 거짓말 쓰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 거짓말 쓰는 거라고 인정한 거 아니냐면서 거짓말을 써내는 성적표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소리를 높이던 슬픈 사건이었다.
‘되도록 긍정적인 행발 쓰기’는 마치 새마을 운동 마냥 전국에 퍼졌다. 이 운동을 통해 교사들은 조금 더 긍정적인 관점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효과를 비웃기라도 하 듯 부정적인 효과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기 말, 학년 말이 되면 관리자들은 빨간펜을 들고 교사들의 성적표에 첨삭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직 부정적인 표현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관리자들은 교사가 왜 그렇게 썼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상 학생들이 어떤 학생인지, 교사는 어떤 고민을 과정을 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사들 또한 관리자들이 왜 그렇게 첨삭지도했는지 묻지 않았다. 경험상 어차피 관리자의 의견대로 성적표는 바뀔 것이기에 그냥 바꾸라는 대로 바꿨다.
‘되도록’이라고 말했지만 거의 ‘무조건’ 긍정적인 행발 쓰기를 강요받다 보니 성적표를 작성하는 교사들의 어깨는 축 늘어지고 말았다.
더 슬픈 것은 ‘되도록 긍정적인 행발 쓰기 운동’의 정착 때문에 교사들은 지인들의 빗발치는 전화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애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써주셨는데, 이거 무슨 말이야?”
일단 학부모들은 긍정적인 행발에 안도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는 행발 해석 공식이 존재한다. 심지어 교사들의 영업기밀이라며 이 행발 해석법을 알려주는 책도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면 ‘언제나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고 무척 활동적이며’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하다’로 해석될 수 있다는 등의 꿀팁을 전수한다.
사실 나도 수년간의 트레이닝(?) 끝에 ‘긍정적인 행발 쓰기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뜻하지 않게 지인들의 성적표를 해석해주는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다. 지인들은 나의 해석을 듣고 나면 마치 용한 점쟁이를 만난 듯 밝은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올 겨울 나는 또다시 ‘되도록 긍정적인 행발’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있다.
올해 교실에서 긍정의 힘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 나도 긍정적인 행발은 여전히 어렵다.
지금 이 시간 찬바람 속에서도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으는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들에게 월드컵보다 더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긍~정 행발! 짝짝짝 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