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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잤다 쿨쿨


퇴근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지호 어머님의 전화다.


“선생님, 오늘 점심시간에 지호가 울었어요.”

“네?”


당황한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감기를 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CCTV를 돌리듯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샅샅이 뒤진다. 아무리 찾아도 지호가 운 장면은 없다. 어머니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어머니, 지호가 오늘 무슨 일로 울었을까요? 제가 지호 우는 것을 전혀 몰랐네요.”

“아, 지호가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라서 선생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휴. 안도한다. 하마터면 아이들에게 무심한 교사 딱지를 붙일 뻔했다.


“아, 그랬군요. 어머니 지호 이야기 듣고 많이 놀라셨죠? 그래도 이렇게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전화 주시면 제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바로바로 처리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내일 출근해서 제가 바로 처리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후. 등줄기에 위치한 땀샘이 곧장 활동을 멈추고 오늘도 수고했다고 동그란 내 등을 두드려줬다.


사실 지호와 지호 어머님은 이른바 ‘단골손님’이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언제나 나를 찾았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언제나 친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응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칙은 있다. ‘사소한’이라는 가치 판단은 언제나 배제한다. ‘사소한’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언제나 ‘심각한’ 것 이기 때문이다.


교사 입장에서는 ‘뭐 이런 걸로 다 울지?’, ‘뭐 이런 걸로 다 전화를 하지?’라고 생각이 드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 판단에 마음을 다 빼앗겨버리면 해결할 수 있는 의욕이 사라진다. 지혜도 떠오르지 않는다.


수년간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나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은 바로 ‘가치 판단의 배제’와 ‘공감’이다.


사실 공감되지 않는 일에 공감하는 것은 참 어렵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영혼 없는 공감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데, 놀랍게도 가끔 영혼 없는 공감이 먹힐(?) 때가 있었다.


때때로 학생과 학부모들은 나의 영혼 없는 공감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제가 쉽게 해결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혼 없는 공감이 참 쓸데없는 소모라고 생각했다. 예리한 나의 주변인들은 영혼 없는 공감 좀 그만하라며 언제나 나를 놀려댔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달콤한 한 방울의 꿀처럼 느끼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많이 만났다. 그럴 때마다 ‘아, 정말 공감이 고팠구나! 결국 원하는 것은 공감이었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영혼 없는 공감에 힘을 쏟은 보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영혼 없는 공감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영혼 있는 공감을 하면 참 좋다. 그렇지만 때때로 영혼 없는 공감이어도 괜찮다.


다음날 지호를 불렀다.

“지호야, 어제 점심시간에 속상한 일이 있었다면서? 왜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안 했어. 선생님이 어제 저녁에 엄마 전화받고 정말 깜짝 놀랐잖아. 속상했을 지호를 생각하다 보니 밤새 한 숨도 못 잔 거 있지. 많이 속상했지?”

“네. 그런데 이제는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지호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선생님에게 바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속상한 일을 집에 가져가서 하룻밤 자면 지호가 너무 힘들잖아. 그럼 선생님도 가슴이 찢어진다고. 알겠지?”

“네. 그럴게요.”


오늘의 공감 지수는 ‘진짜:가짜=7:3’였다. 왜냐하면 잠은 잘 잤기 때문이다. 그것도 쿨쿨. 좀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안심하는 지호의 표정을 보니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이라는 큰 통에 ‘진짜 공감 가루’와 ‘가짜 공감 가루’를 적절히 배합하면 상황이 좀 더 부드러워진다.


가끔은 내 의도보다 더 상황 해결이 쉬워지기도 한다. ‘가짜 공감 가루’는 빵 맛을 더욱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몰래 배합한 ‘가짜 공감 가루’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 접어두어도 괜찮다.


그러나 가끔 나도 말도 못 할 만큼의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잠을 통 못 잔다. 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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