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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밤 Jul 05. 2023

밸런타인 카드에 담긴 진심

밴쿠버에서 친구 사귀기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가고 싶다면
우선 보이는 곳 끝까지라도 가보자

그러면 처음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가 밴쿠버에 도착한 2021년 겨울, 한국은 코비드가 기승을 부렸지만 이곳은 점차 완화되는 분위기였다. 아이들과 난 한국과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추운 겨울에도 이곳저곳을 누비며 밴쿠버를 즐겼다. 물론 비자 및 신분증 발급, 자동차 구매, 거주 준비까지 낯선 곳에서의 정착과정이 녹록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할 것은 바로 아이들의 ‘학교생활’이었다.


밴쿠버는 유학생이 많은 편이라 보통 한 반에 한국아이들이 두세 명은 있다 들었는데 코비드 때문이었는지 우리 아이들은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아이들은 어학원 유치원을 다니고, 화상영어도 잠시 했지만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진 않았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혹시 언어 때문에 차별받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1학년으로 이곳에서 처음 초등생활을 시작한 둘째는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재잘거리길 좋아하는 여자아이 특유의 성격이 한몫하는 것 같았다. 베스트 프렌드를 사귀었다고 하더니 얼마 안 돼 생일파티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문법도 맞지 않고 오류도 있었지만 둘째는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감을 가지게 된 둘째는 학교생활을 즐거워했고 친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갔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모범생이었던 첫째는 친구들을 쉽게 사귀지 못했다. 방과 후 학원을 돌며 시간을 보내던 아이에게 종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밴쿠버의 학교생활은 낯설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은 이미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학교에 가보면 아이는 운동장 끝을 빙빙 돌며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아야 했다. 바깥활동보다 조용히 책 읽기를 즐겨하던 아이는 혼란스러워했고, 괜히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던 아이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나 또한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발 벗고 도와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2월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왔다. 학교에서 반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밸런타인 카드를 준비해 달라 하였고, 이 많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카드를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이들은 정성을 담아 한 자 한 자 꾹꾹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어느새 사각사각 연필소리만 방 한가득을 채웠다. 첫째 아이의 카드를 슬쩍 훔쳐보니 나도 같이 축구를 하고 싶어, 란 문장이 눈에 띄었다.


넌 축구를 정말 잘하더라.
난 잘 하진 못하지만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내게 축구를 가르쳐 줄 수 있겠니?


왈칵 눈물이 나려 했다. 아이는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토닥이는 게 전부였던 엄마에게 늘 말없이 씩 웃어 보이던 아이였다. 하지만 하교할 때 아이를 데리러 가면 늘 혼자였고 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일 년간 별다른 탈 없이 무사히 학교생활을 보내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한국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축구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축구를 배워야겠다 생각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에서의 지난 시간 동안 아이는 내가 짜놓은 틀 속에서 일상을 보내왔고, 나는 그것을 최선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이의 카드를 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인 내가 아닌 온전히
아이들이 주인이 된 인생의 첫 시간이었다


형식적인 밸런타인 카드 행사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이미 밴쿠버의 일상에 들어와 있었다. 함께 오자고 한 것은 나였지만, 학교생활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다음 날, 친구들의 카드를 받아본 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해피 밸런타인, 이라는 한 글자만 새겨져 있는 끄적인 종이들 또는 아주 작은 엽서 같은 것들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 아이들처럼 정성스러운 줄글이 새겨진 카드를 준 이는 없었다. 혹여 어제 편지를 쓴 시간이 억울하다 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특히 첫째는 친구가 카드에 큰 감동을 했다며 오늘 같이 축구를 했다고, 앞으로 열심히 배울 거라며 신나 했다.


만약 한국에서 우리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속상해했다면, 난 어떻게든 친구들을 연결시켜 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밴쿠버에서는 나 또한 처음이고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 학교생활의 고민거리가 ‘영어’가 아닌 ‘축구‘가 될 거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그렇게 아이를 통해 난 밴쿠버 일상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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