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밤 Jul 05. 2023

벚꽃, 맥주 그리고 스탠리 파크

내 마음에 찾아온 봄



구속당하지 않는 행복한 자유에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책임이 함께한다


밴쿠버의 겨울은 유난히 길다. 종일 비가 내리고 오후 4시면 깜깜한 밤이 찾아온다. 어쩌다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거리마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해피 써니데이’라며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도 잠시, 금세 내 마음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운전과 요리가 익숙지 않은 나에게 밴쿠버는 불편한 곳이었다. 한국만큼 대중교통이 발달되지도 않았고 외식은 비싸고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오후에는 빗속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겠다며 호기롭게 이곳에 왔건만, 난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3월이 되었지만 봄은 찾아올 기미가 없었다. 축축한 빗방울에 젖어 있는 하늘을 마주하며 난 한없이 가라앉았고, 점점 집 밖을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 몫도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새로운 곳을 가기 위해서는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고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내를 가져야 했다.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의 성취감도 잠시, 눈앞의 장벽들이 도미노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3월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아이들과 같은 학교 학부모로 만난 엄마들과 스탠리 공원에 놀러 갔다. 모두 비슷한 시기 이곳에 와서 한창 밴쿠버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던 터였다. 좋은 분들의 초대에 감사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창밖을 통해 바라보는 밴쿠버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 스탠리 공원에 들어서자 하얀 벚꽃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고 공원에는 향기로운 꽃내음이 가득했다. 꽃구경을 실컷 하고 브루어리로 가서 맥주와 음식들을 주문했다. 밴쿠버에서 먹는 첫 맥주였다. 알싸하고 시원한 목 넘김에 손끝까지 찌릿했다.


밴쿠버는 이미 봄이었다
내 마음이 겨울이었을 뿐이다


이곳에 와서 예상대로 일이 흐르지 않을 때 난 무력감을 느꼈다. 한국에서의 ‘나’와 낯선 캐나다 땅에서의 ‘나’는 같을 수 없음에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자 착각이었을까?


함께 온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나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했던 것은 예상외의 상황과 어려움을 겪더라도 결국 해결은 된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이는 그러한 일을 겪고 ‘지나고 보면 날 더 성장하게 한 계기였어.’라고 말하거나 누군가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야. 정말 후회돼.’라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내가 느낀 것은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힘들지만 그래도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벚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원한 맥주 때문이었을까.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녹으면서 여태 입었던 두툼한 겨울점퍼가 무겁게 느껴졌다.  


“왜 아직도 겨울점퍼를 입고 있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점퍼를 벗자 상쾌한 산들바람이 쓰윽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내 마음에도 봄이, 왔다.


이전 03화 밴쿠버에서는 무슨 학원을 다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