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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Jan 25. 2023

다시 걷기는 힘들겠습니다

중심을 지키는 확신

퇴원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남편의 정밀검사를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고, 그로부터 몇 주 후 첫 외래진료가 잡혔다.


오랜만에 보는 담당의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진료실 앞에는 하나같이 간절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잘 지냈냐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MRI 영상을 확인하면서 치료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암세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데, 골반뼈가 으스러져서 신경이 회복되더라도 다시 걷기는 힘들겠습니다.”


담당의는 이 말이 남편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을까? 겨우 희망을 품고 재활을 시작한 남편에게 다시 걷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그저 가혹한 말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말이었고, 겨우 살기로 마음먹은 남편을 세상이 조롱하는 것과도 진배없었다.


남편은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누가 말을 걸어도 들리지 조차 않는 듯했다.  


처음 남편이 가망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듯이 나는 남편이 걷지 못할 거라는 말도 믿지 않았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거부하겠다는 아집이 아니었다. 담당의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매일 남편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남편의 병에 대해 공부했던 내게는 담당의가 하는 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불현듯 입원 중에 PET CT 결과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방사선과 전문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이라면 분명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무작정 방사선과 진료를 잡았다. 남편은 다시 병원에 가자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나는 대리진료라도 받겠다는 마음으로 혼자 집을 나섰다.  


그날 병원을 향하는 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분명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병원에 갔는 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난 공포와 긴장감에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눈빛만은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일 사람처럼 지나치게 번뜩였을 테니까.




갑작스러운 대리진료를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방사선과 전문의는 나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담당의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꼭 다시 확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를 진정시키며 잘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더니 남편이 치료 전, 치료 직후, 그리고 가장 최근에 촬영한 MRI 결과를 순서대로 모니터에 띄웠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의견이 전혀 다릅니다. 치료 후 암세포가 파괴되면서 비어 있었던 골반뼈 부분이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화면에 띄워진 세 장의 사진을 번갈아 비교해 보던 중, 담당의가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폴더를 뒤져가며 MRI영상을 열어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이전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가장 최근 영상만을 봤던 것이다. 마지막 결과만 본다면 골반뼈가 으스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 결과와 비교해 봤을 때는 오히려 빈 부분이 채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흔치는 않지만 젊은 환자들에게서 암이 제거된 자리에 뼈가 채워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남편분의 상황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안도감에 무장해제되어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다시는 못 걷는다는 소리에 남편이 삶의 의지를 잃었고 지금 선생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모른다는 얘기를 횡설수설 쏟아내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많이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그는 나를 달래며 앞으로 PET CT나 MRI 촬영을 하게 되면 남편과 함께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잘 설명해 주겠노라 얘기해 주었다.


거듭 감사하다 말씀드리고 병원을 달려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내가 만약 이날 방사선과를 찾지 않았다면... 남편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저앉아 버렸을까? 사는 걸 포기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견디다 보면 또 어느 순간 희망을 품고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시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만은 분명하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오랜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며 죽은 듯이, 어쩌면 죽지 못해 살아갔을지 모른다.


날마다 굽이치는 삶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로 이런 확신이 아닐까... 무엇하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적어도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다고 믿을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크고 작은 파도에 휘청이는 나지만, 꿋꿋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다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 시간들이 쌓여 내가 나를 더 믿을 수 있기를, 아무리 험난한 길도 헤쳐나갈 힘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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