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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Jan 25. 2023

지금 떠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방향 전환

“나 지금 정말 맨 정신이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지금 떠나도 크게 미련이 없을 것 같다. 도와주면 안 될까...”


또 그 소리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지만 지금 남편은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차분하게 대응해야 하리라.


“그동안 고생만 해놓고 지금 다 놓아버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잖아."


“이제 그만하고 싶다. 너무 지쳤어.”


  년만 버텨보자.   동안   있는   해보는 거야.   뒤에도 네가 같은 생각이라면그래. 스위스에 데려다줄게. “


밤만 되면 찾아오는 미칠 듯한 통증에, 하루 종일 누워서 먹는 것, 씻는 것, 배설하는 것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해야 했던 남편은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에 시달렸고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차라리 못 움직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나는 남편이 죽고 싶다고 울부짖을 때마다, 조금만 버티면 분명 나아질 거라 말하고 그를 달랬다.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그가 이 시기를 버틸 힘을 줘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죽을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그의 정중한 부탁은 오히려 살려 달라는 간절한 외침으로 들렸다. 그러나 간절한 아내의 실낱 같은 희망 따위 당시의 남편에게 들릴 리 없었다.


사실 남편이 처음 자살사고를 했을 때 나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희귀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정신이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안일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를 계속 유보하고 있었을 뿐, 남편의 속은 점점 더 곪아가고 있었다. 길을 잃은 우리는 무엇하나 보이지 않은 어두운 적막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낙천적이다. 다수의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크고 작은 정신적인 문제들,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그저 먼 나라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매일 자살을 생각하는 남편을 돌보면서 나도 점점 우울해졌다. 어떻게 해봐도 남편의 자살사고를 멈출 수는 없었기에 나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나 또한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베란다를 응시하며 남편의 휠체어를 붙들고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내 뺨을 세게 내리치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계속 우울에 빠져 무기력하게 있을 형편이 못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바쁘니 우울할 틈이 없었다.


힘들어도 움츠려들 수 없었고 어떻게든 일어나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암울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새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내 소중한 친구 중 한 명은 임상의과학 의학박사과정을 밟고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간간히 생존신고만 하고 있던 차였지만, 남편이 놀랍도록 침착하게 본인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던 날 나는 그녀의 도움이 간절했다.


매일같이 수다를 떨던 친구에게 정말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기가 무섭게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전문가로서의 조언을 구했다.


친구는 남편이 정신과에 입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사지마비의 암환자라는 점에서 우선 가까운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약 처방이라도 받을 것을 강력히 권했다. 그녀는 공황증상은 처방약으로 금방 사라질 테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었고, 나와 남편 모두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해 주었다.


남편 곁을 항상 지키고 있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착각에 불과할 터... 친구의 조언에 따라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남편과 적절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씻고 재활운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편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조정했다. 처음엔 30분으로 시작해서 그가 소변을 참을 수 있는 시간까지 점점 남편과의 거리두기 시간을 늘렸다.


그의 정신적인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들의 시선이 싫다며 밖에 나가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남편은 결국 정신과 진료에 응했고, 상담을 받고 처방약을 먹으니 공황장애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더 이상 남편은 자신이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끔찍한 부탁을 하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 속을 헤매는 중이지만 조금씩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다. 원치 않는 상황을 지금 당장 바꿀 수는 없더라도, 내가 지금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결국 다다르게 될 목적지는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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