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의 하루
방사선 치료가 끝났고 하루하루 남편의 몸을 타고 올라가며 옭아매던 마비의 진행도 멈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암세포가 파괴되길 기다리면서 경과를 지켜보고 그에 맞는 다음 치료 플랜을 세우는 것이다. 우선 방사선 치료의 경과를 6개월 이상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퇴원을 하고 주기적으로 통원을 하며 담당의의 진료를 받고 재활 치료도 받아보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바로 퇴원을 권했지만 이번에는 고집을 부렸다. 단 며칠이라도 재활치료를 받아보고 퇴원하겠다고 하고 일주일 뒤로 퇴원 날짜를 미뤘다.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과 내가 또 어떤 전쟁을 치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냥 기뻤던 것 같다. 퇴원을 결정하고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병동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여섯 시가 되면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혈압과 당을 체크하고 아침 약을 전달한다. 그러나 보통 그전에 누군가의 신음소리, 일찍부터 검사를 하러 이동하는 소리 등에 눈이 떠진다.
암병동에는 움직임이 불편한 환자들이 많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동 요원이라고 불리는 젊고 건장한 남성들이 검사 스케줄에 맞춰 찾아온다. 그들은 환자를 휠체어에 태워서, 혹은 침대째로 검사장소로 이동시킨다. 입원환자의 경우 이른 새벽이나 늦은 저녁시간에 검사가 많이 잡히는 것 같았다. 환자가 침대째로 이동하고 난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스산함이 느껴지곤 했다.
이밖에도 암병동의 입원실은 아침부터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고 환자의 간단한 상태들을 체크하는 직원들, 이동식 촬영장비를 끌고 와 검사를 하는 의사들, 수액이나 진통제, 항암제 투여량을 확인하고 교체하는 간호사들로 늘 번잡하다.
하루에 한 번씩 체중을 재러 오는 직원도 있었는데 와상환자들은 조금 특별한 침대를 사용한다. 병상에 체중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병상에 올려져 있는 (혹은 달려있는) 핸드폰 거치대나 수건 같은 물건들을 치우고 나면 환자를 이동시키지 않고 바로 체중을 확인할 수 있다. 십 년 넘게 늘 75kg 정도를 유지하던 남편의 몸무게는 투병을 하면서 10kg 이상 줄었다.
7시가 되면 배식이 시작된다. 이때 그날의 메뉴를 확인하고 선택식을 고르는 일은 갑갑한 병원생활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아침밥을 먹고, 약을 챙겨 먹고 나면 담당의가 회진을 돈다. 6인실을 사용하면서 프라이버시를 기대할 수는 없다. 병실을 공유하는 환자들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진행상태는 어떤 지, 호전은 되고 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가없다.
암병동에 입원을 하는 경우는 보통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서인데 그 과정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이다. 독한 약에 고통스러워하며 잘 움직이지도 먹지도 못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슬픔에 먹먹해진다. 환자들은 수시로 고통에 신음하고, 사랑하는 이의 아픔에 상심하고 긴 간병에 지친 보호자들의 흐느낌도 이따금씩 들린다.
암병동에서 남편은 이례적으로 젊은 환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와상환자였고 마약성 진통제를 최대복용량으로 먹는 것으로도 부족해 진통제 패치까지 가슴에 붙여야 겨우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담당의 회진 때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병실의 전우들, 그리고 보통 그분들의 아내인 보호자들은 자식뻘의 우리 부부에게 닥친 상황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젊은 나이에 아픈 남편을 간호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일반병동에서 그리고 암병동에서 만난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분들은 간병이 서툰 나에게 남편을 굴려가며 침대 시트를 가는 법부터 냄새가 퍼지기 전에 기저귀를 처리하는 법까지 많은 걸 알려주셨다. 음식을 나눠주셨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며 내가 혼자 울고 있을 때 말없이 나를 보듬어 주시고 같이 울어주셨다.
우리처럼 길게 입원하는 환자는 드물었기에 긴 인연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당시 나에게 누구보다 큰 위로가 되어준 그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이다. 진심으로 내가 만난 모든 환자들의 쾌유를 빈다.
우리는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길고 긴 재활의 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