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침범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더 이상 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하지 않았다. 진통제의 양을 계획적으로 줄여갔고 곧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는 분명 통증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약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결단력 있게 행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나는 남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불편해하더라도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홀로 서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환자라고 해서 프라이버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편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칠 때는 그의 곁을 잠시만 비워도 불안했고, 그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는 일부러 옆에서 쉼 없이 재잘거리던 나였다. 그 영원 같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이제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남편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근 일 년을 누워만 있던 그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마음속에서 셀 수도 없는 전쟁을 치렀을 것이며 나로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깊은 성찰을 겪었으리라.
문득 연애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우리는 함께 봉사활동을 갔었다. 진행성 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소년들의 식사와 목욕을 돕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린 친구들은 밝고 유쾌했다.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은 몸의 모든 근육을 서서히 위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결국엔 호흡마저 어렵게 만들어 청년의 나이를 넘기기도 전에 생명을 앗아가 버린다고 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가지고 끔찍한 병마에 맞서 싸우고 있었고,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바깥세상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싶어 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의 연애담이나 학교생활에 대해 얘기하며 어린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나 그들의 목욕을 준비하면서 나는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 것이다. 근육이 다 빠져 앙상한 몸에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반복되어 뒤틀려진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보였다. 얼른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후로 내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다. 유독 조용하던 한 친구는 어색해하는 내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괜찮아요. 여기 오는 누나들은 다 울어요...”
남편은 달랐다. 다들 어린 친구들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워 머뭇거릴 때, 남편은 그들을 번쩍번쩍 들어다 앉히고 가녀린 몸을 벅벅 문질러대며 씻겼다.
"너 이 자식 때 나오는 거 봐라"
"아이, 형 진짜"
아이들은 유난히 남편을 따랐다. 그들은 자신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그저 또래의 아이들과 동일하게 바라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도움과 적당한 무관심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남편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유난히 커 보였던 그날 남편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뿐이다.
몸이 불편한 환자를 돌보다 보면, 많은 경우 환자가 무언가를 하도록 돕는 것보다는 대신 그 일을 해버리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일까? 병원에서도 환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보호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환자의 손과 발을 자처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환자의 일에 관여한다. 물론 환자들은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보살핌이 그들 스스로를 무력하게 느끼게 한다면 차라리 무관심한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전사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그들의 한계는 오직 그들 만이 정할 수 있다.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남편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나의 역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