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의 극복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힘드신가요?”
“남들과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저 때문에 와이프 고생하는 것도 싫고, 사실 별로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나질 않네요.”
“네가 아파서 내가 고생한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런 생각이 날 힘들게 하는 거라고!”
끼어들지 말았어야 하는 그의 상담시간에 나도 모르게 그동안 쌓여왔던 말을 내뱉어버렸다.
“자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내 인생은 끝날 수도 있었는데, 나에게 더 살 수 있는 추가 시간이 덤으로 주어졌다고요. 오늘 하루가 덤으로 주어졌네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보면 어떨까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생각의 전환이 되는 것 같긴 하네요.”
하루하루 감사함에 살아가다가도 그 생활에 어느새 익숙해져서 마치 당연하게 느껴질 때, 얄팍한 인간의 본성에 치가 떨리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꾸만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동안은 아침에 일어나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도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처음 몸을 뒤집었을 때, 처음으로 혼자 휠체어를 타고 침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몸에서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했던 내 눈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다 가능할 것 같았고 이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행복을 마음에 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계속 품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상황이 나아지면서 오히려 남편과 다투기 시작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남편의 태도에 점점 불만이 쌓였다.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늘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는 그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상담내용을 들으면서 (더 정확히는 정신과 전문의의 대응에 감탄하면서), 그의 삶의 태도를 불평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매일 통증에 시달리고 잠 못 이루던 때 그에 대한 불만은 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지조차 못했었다. 제발 통증만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잠이라도 푹 잤으면 좋겠다던 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는데, 어느새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내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나는 남편을 돌보면서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오만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겪은 일들을 내가 전부 이해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가 겪은 고통,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모든 고난과 좌절을 대신 감내해 줄 수도 없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이겨내기 힘든 고통에, 그리고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희망에... 그는 지쳐왔을 것이다. 내 역할은 적당한 거리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었고 오히려 나는 좀 더 시간을 내어 스스로를 돌봤어야 했다.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보호자로서의 삶은 꽤나 고달프다.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 먼저 밥을 먹인다. 그러고 나면 나는 허겁지겁 먹는 둥 마는 둥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남편을 운동시키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눕히고 나면 밀린 집안일이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마치 전쟁을 치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임했다.
늘 남편을 우선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다 나라는 자아가 사라질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보호자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그래서 가끔 서럽기도 하다. 남편마저 나에게 쌀쌀맞게 대할 때면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억눌려있던 억울함이 폭발하면서 남편과 다투곤 했다.
그렇게 몇 번 다투기를 반복하자 남편은 나에게 떠날 것을 제안했다.
“넌 정말 할 만큼 했어. 네가 날 버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미련하게 굴지 말고 너도 이제 네 인생 살아.”
어이가 없어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곧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쳐가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하려 애썼고, 그러면서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남편 옆에 누워서 내가 남편이라면 지금 어떤 말이 듣고 싶을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어쩌면 진작에 말해줬어야 하는 이야기,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말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난 널 동정하는 게 아니야. 사랑해서 결혼했고 좋은 순간 함께였듯 힘든 순간도 당연히 함께하는 것뿐이지. 난 네가 금방 일어설 걸 알아. 다시는 그런 얘기하지 마.”
그리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을 향한 내 절절한 사랑을 고백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남편의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을 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상황을 조금 가볍게 여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우리에게 오늘 하루가 덤으로 주어졌으니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즐겨보면 어떨까 하는…
나는 더 이상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웃음을 되찾았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더 이상 환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씩 나만을 위한 시간도 갖기 시작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상황은 점점 더 가벼워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다투지 않았다.
어제 내가 어떤 날을 보냈든, 그 하루가 설령 지독히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오늘 내가 맞이한 하루는 어제와는 다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음을 참 어렵게 깨닫는다. 이렇게 어리석은 내게도 매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지니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