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물여섯, 나는 내가 되기 전에 먼저 엄마가 되었다!
임신 5개월이 되었을 무렵, 이제 제법 티도 나도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고 자란, 25년간 살았던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 혼인신고를 하고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인천으로 갔다. 인천 연수동에 있는 10평 정도 되는 1500만 원짜리 원룸이 우리의 첫 신혼집이었다.
당시 나와 함께 졸업했던 남편은 인턴으로 근무시작한 지 몇 달이 채 안되었고, 나도 구직활동을 하던 중에 임신을 한 터라,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부터 한 우리에게 격노하신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펄펄 뛰셨고, 남편은 거의 호적에서 파이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은행에서 1000만원 대출을 받고 친정 아버지가 주신 500만원으로 아끼고 아껴서 살림을 사고, 남은 200만 원은 전세금에 보탰다. 그래도 모자란 300만 원은 남편이 누나로부터 빌려왔다. 그렇게 마련한 원룸에서 첫 아이를 낳고 소꿉놀이 같은 첫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이 의왕에 있는 무선중계기를 제조하는 새 회사로 출근을 시작하며, 우리는 1년 만에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의 두 번째 집은 방 2칸과 거실이 있고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1층집 오른쪽이었다. 왼쪽은 우리보다 먼저 이사온 노부부가 살고 계셨고, 주인 부부는 2층에서 살았다. 옛날 집이라 어둡고 낡았지만, 방이 2칸이고 거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였지만, 나는 신문구독을 신청했다. 결혼생활 초기,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신문은 세상과의 연결이자 소식통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바닥에 신문이 놓여 있었다. 신문을 들여오면, 나는 아이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하루종일 짬짬이 신문을 읽었다. 그날 신문을 다 읽지 못한 날엔 거실 바닥에 읽다 만 신문을 펼쳐놓은 채 방에 들어가 잠들기도 했다.
그때 신문에는 다양한 종류의 광고가 실렸는데,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대학입학 광고가 실리곤 했다. 나는 신문에 실린 교대 입시공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내가 이제 교대를 간다면 인천이나 서울에 있는 교대에 가면 좋겠다.' 처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내가 다시 수능을 쳐서 대학에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하곤 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짜릿하고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점점 그 꿈은 현실에서 멀어져 갔다.
'내가 공부를 안 한지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 내가 다시 수능을 치면 예전만큼 성적이 나올까?'
'학원에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학원비는 비쌀 텐데, 어떻게 마련하나?'
'내가 학원에 다니고 공부하면, 우리 Y는 어떻게 하지? 누구에게 돌봐달라고 맡길 사람도 없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니, 더 이상 교대 입시공고는 나의 설렘과 희망이 아니었다. 아기 엄마가 된 나는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꿈꿀 수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한껏 부풀었던 나의 기대와 희망을 다시 한번 내려놓아야 했다.
고3이었던 그때, 전기대학에 떨어지고 어이없고 낭패스러운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갔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반갑게 달려와 나에게 덥석 원서를 내밀며, 대구교대가 미달되었으니 지금 당장 지원서를 내러 가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그때 시간도 너무 촉박했고, 지금처럼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갑자기 대구까지 감행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끝내 대구에 가지 못했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대구교대에 갔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내가 대구교대에 갔더라면, 나는 내가 원하는 선생님이 되었을까?'
'나는 선생님이 되어서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할까?'
20대 내내 정말 많이 했던 생각이다. 그때 내가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슴한켠 아려오는 그 때의 일으 회상하며 내 앞에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참 예쁘고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나의 딸 Y를 바라보았다!
그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또한번 마음을 접었다.
'나는 이제 엄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