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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줍음 Aug 10. 2023

"누가 보면 엄마 없는 애들인 줄 알겠다!"

두 번째 경력단절 _ 네 번째 이야기

<12> "누가 보면 엄마 없는 애들인 줄 알겠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정확히 1년이 걸렸다. D보건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만난 교수님의 추천으로 K-원격평생교육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회복지사 2급 취득 과목을 그곳에서 이수했다. 4년대졸 학사 기준으로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총 42학점, 10개의 필수과목과 4개의 선택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필수과목들은 사회복지개론이나 정책론, 행정론, 실천론, 실천기술론, 조사론, 법제 등의 과목으로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는 과목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였고, 앞으로 내가 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으로 알고는 있어야 하기에 열심히 듣고 받아 적었다.   

   

인간행동과 사회환경, 지역사회복지론, 정신건강론(선택과목) 등의 과목은 너무너무 재밌었다. 인간행동과 사회환경, 정신건강론이라는 과목을 통해 평소 궁금하고 이해 안 되었던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비록 얕은 지식으로나마 충족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복지론이라는 과목은 사회복지사의 역할을 단순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문제해결과 개입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사회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 주었다.      


수업을 들으며 사회복지 분야는 실천 대상에 따라 아동복지, 청소년복지, 여성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등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실천 현장에 따라 의료사회사업, 학교사회사업, 군사회복지, 교정복지 등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과목들을 다 공부해 보고 경험해 본 후에 나에게 제일 잘 맞는 분야로 진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1년이란 제한된 시간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볼 수는 없었다.    

  

세 아이를 기르는 엄마이자 불안하고 불행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였기에 나는 아동복지론과 청소년복지, 학교사회복지 과목을 선택했다. K-원격평생교육원에는 학교사회복지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기에 S디지털대학교에서 별도로 신청하여 들었다. 비록 자격증을 취득해서 취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1년간의 사회복지 공부는 내게 최고의 공부였다. 교대나 사회과학 전공을 희망했던 나는 결국, 사람들의 성장과 행복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4년간의 대학공부가 공학적 지식만을 가르쳤던 건 아니었지만, 흥미와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공부를 힘겹게 마쳤던 나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행복 추구’를 도와주는 사회복지 공부는 그야말로 ‘잃어버렸던 공부맛’을 되찾는 공부였던 셈이다.     

 

매주 7과목씩 정해진 분량의 수업을 듣고, 쪽지시험을 보거나 과제를 하는 방식이었다. 원격으로 치르는 시험이긴 하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쳤다. 시험은 대부분 오픈북으로 진행되었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풀기 위해서는 어차피 수업을 충실히 들어야만 가능했다. 게다가 출석점수도 반영이 되었기에, 나는 모든 수업을 거의 출석 100%로 들었다. 집안 대소사나 행사가 있다거나, 갑자기 아이들이 아파서 며칠씩 수업을 못 듣는 경우, 손님이 오거나 여름휴가 등을 다녀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수업이 몇 회차씩 밀리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100% 출석 후에 시험 보는 것을 목표했기에, 주말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컴퓨터가 있는 작은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루종일 밀린 수업을 다 듣고 시험까지 치고 나서야, 13시간 만에 방을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2학기가 되자 바로 사회복지실습을 나가야 했다. 아직 셋째는 두 돌도 안 되었고, 기저귀도 못 뗐을 때였다. 실습시간 160시간을 채우려면 하루 8시간씩 20일을 출근해야 했기에 셋째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다. 막연히 셋째가 두 돌이 지나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취업할 때쯤 맡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빨리 다가왔다.      


셋째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큰아이가 젤 처음 다녔던 어린이집에 맡겼다. 강아지같이 순한 눈망울에 말도 못 하고 기저귀도 못 뗀 아이를 어떻게 맡기고 돌아섰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고 눈물이 난다. 그때 당시 나는 참 모질고 모질었던 것 같다. 다행인 건 원장님도 우리 막내반 담임선생님도 신뢰가 가고 참 좋은 분들이셨다. 특히 담임선생님은 체격이 통통하신 분이었는데, 우리 막내 S를 특히 귀여워하셨다. 선생님의 아들이랑 우리 S가 많이 닮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다.     


우리 막내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다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어린이집으로 출근하셨다. 나는 내 아이를 맡기고 사회복지실습을 하기 위해 지역아동센터로 출근했다. 언젠가 또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바로 내가 본 보육교사의 딜레마였다. 내 일을 하기 위해서 내 아이는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나는 출근하여 다른 아이들을 돌본다. 내 아이도, 다른 아이도 정상적으로 잘 크고 잘 자란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매우 큰 현타와 함께 엄마로서, 보육교사로서의 자괴감이 몰려온다.


어쨌든 나는 P지역아동센터에 실습기간을 포함하여 약 6개월 정도 나갔다. 지역아동센터는 초등학생들이 방과 후에 오는 곳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출근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에 아이들 오는 시간에 맞춰 출근을 했고, 주로 하는 일은 아이들 기초학습지도와 생활지도를 했다. 나는 리본공예와 풍선아트로 특별활동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내가 실습한 지역아동센터는 고학년 남학생들이 유독 많은 곳이었기에, 나는 아이들과 친해질 겸 1주일에 한 번씩 체육수업이 있는 날마다 보조교사로 따라 나갔다. 나는 구두를 신은 채로 아이들과 축구를 했고, 축구가 끝나고 나면 애들과 내 발등에는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아있곤 했다. 이때 아이들은 나를 ‘하히힐샘’이라고 불렀다.

    

내가 실습을 마지막으로 마치는 날이었던가, 센터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떡볶이집에서 사먹는 흔한 빨간 떡볶이가 아니라, 소고기와 표고버섯과 당근 등을 넣은 궁중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이른저녁으로 해먹이고, 평소보다 귀가가 좀 늦었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는 데 우리 아이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큰아이는 막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둘째는 옆에서 칭얼거리는 동생을 얼러주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엄마 오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 일제히 "엄마~~~" 하고 소리를 쳤다. 


아이들을 보는데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큰아이와 둘째는 아침에 묶어줬던 머리가 느슨해져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지며 거의 산발이 되어 있었다. 치마는 옆으로 돌아가고 예쁘게 묶어줬던 리본끈은 힘없이 풀려있었다. 삼남매는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꼬질꼬질하고 누가 봐도 엄마 없는 아이들 같았다. 얼른 달려가 아이들을 끌어안는 데 창피함과 미안함과 속상함이 북받쳤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고 이 녀석들아, 누가 보면 엄마도 없는 애들인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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