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줍음 Aug 10. 2023

"당신은 끝까지 해내는 일이 없는 거 같아."

두 번째 경력단절 _  세 번째 이야기

<11> "당신은 끝까지 해내는 일이 없는 거 같아."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고 공부하느라, 늘 바쁘게 움직였다. 가 밖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동네 언니들과 노닥노닥 차 한잔 마실 여유도 없었다. 어쩌다 친정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전화해도 집에 앉아 한가하게 전화받을 새도 없었다. 매일 ‘이거 배운다, 저거 배운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나를 두고 주변에서는 이런 말들을 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너는 왜 그렇게 니 신세를 들들 볶니? 그냥 적당히 좀 편하게 살아.”

“그냥 김서방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아껴서 살면 안 되니? 니가 벌면 얼마나 벌겠다고?”

“너는 애도 셋이나 되는데,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게 돈 버는 거야. 너 나간다고 화장품 사 바르지, 옷 사 입지. 애들 맡긴다고 여기저기 돈 쓰지. 돈 벌어서 뭐 남는 거라도 있니?”     


하긴 맞는 말이긴 했다. 내가 벌면 뭘 얼마나 번다고. 벌어봐야 기껏 아이들 사주고 싶었던 책을 사주었던 것 같다. 남편 월급으론 먹고 살기에도 빡빡해서, 도저히 몇 십만 원씩 하는 전집을 사주기엔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루하루 일당처럼 돈을 벌면 그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었던 책들을 전집으로 들여놓았다. 창작동화, 전래동화, 과학동화, 위인전기 등 책장 한가득 채워놓고 줄구장창 읽어주는 게 그 시절 내 보람이자 낙이었다.      


동네 엄마들이랑 어울리다가 비즈공예를 배우기도 했다. 손끝이 여물고, 꼼꼼해서 ‘제법 솜씨 좋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비즈공예로 이것저것 만들어 주위에 선물도 하고,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문화센터에서 취득한 선물포장 자격증은 아쉽게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딱 한번 백화점에서 빼빼로 데이 시즌에 포장 아르바이트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들을 맡길 수가 없어서 결국 가지 못했다.   

   

문화센터에서 취득한 풍선장식과 리본공예 자격증으로는 2년 정도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일도 내 마음에 충족되는 일은 아니었다. 뭔가 지속적이지도 않고 경제적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모름지기 직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꾸준히 일정하게 일을 하면서도 일정 소득 이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에서 부합하지 않았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취득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어디론가 출근을 하면 모를까, 우리 집에서 내 아이들과 같이 홈스쿨을 진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딜레마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엄마인지? 선생님인지? 친하게 지내는 이모인지?’ 또 우리 집이 ‘쉬는 공간인지? 공부방인지?’ 헷갈렸다. 또한 아이들도 ‘우리 엄마인지, 선생님인지’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일정하게 꾸준히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일정소득 이상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갖고 있는 자격증이 모두 민간 자격증이라서 이런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민간자격증은 협회나 사단법인 같은 곳에서만 인정을 해주니까. 솔직히 누구라도 마음먹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취득할 수 있으니까. 그만큼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메리트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이르니 자연스럽게 국가가 인정해 주는 국가공인자격증을 취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생각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자격증을 취득하면 바로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국가공인자격증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회복지사, 직업상담사, 평생교육사! 이렇게 3가지 자격증을 찾아냈다.


직업상담사는 1998년 IMF 직후에 졸업한 내 대학동기 중 가장 친한 친구가 그때 막 노동부에서 신설한 ‘직업상담원’이라는 직무에 취업하여 5년간 일한 경험이 있기에 어느 정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직업이었다. 친구한테 전해 들은 직업상담원은 하루종일 컴퓨터 시스템을 들여다보며 실업급여 수급 대상자들과 실랑이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당시 IMF로 인하여 한꺼번에 대량으로 발생한 실업자들과 직원상담원들과의 상황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어쨌든 내겐 재미도 없고, 스트레스도 많은 일이라는 선입견이 강했기에, 별로 내키지 않았었다.   

   

평생교육사는 한때 교대를 지망했던 내게 제일 호감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격을 취득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2009년 당시만 해도 평생교육사는 학점은행제로 과목을 이수하여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었다. 최소한 사이버대학교라도 편입을 해서 필수과목을 이수하고 졸업을 해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결국 3학년에 편입을 하더라도 최소한 2년의 시간은 걸리는 셈이었다.   

  

사회복지사는 고등학교 때 대학 진학 학과로 고려해 볼 만큼 호감이 있었다. 게다가 비록 공대이긴 하지만 내가 4년 대졸 학력이었기에 학점은행제로 42학점만 이수하면 1년 만에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더군다나 아이 셋을 기르며 막내가 이제 갓 돌이 지난 나에게는 온라인이 아니면 선택지가 없었다. 나의 계획은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밤시간을 이용하여 인터넷 수강을 하고 싶었다. 적어도 셋째가 두 돌이 지나고 기저귀를 뗄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있고 싶었다. 그 사이에 1년간 사이버로 학점을 이수하여 자격증을 취득하면 '셋째도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시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계산을 해볼 수 있었다.    

 

나는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1년간 또다시 공부를 하려고 하니 남편에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문화센터부터 대학교 평생교육원까지 2년간 지불한 교육비만 수백만 원에 이르렀다. 그걸 가지고 활용해서 돈을 벌줄 알았는데, 이제 또 새로운 걸 배우겠단다. 이제 또다시 1년간 학점은행제로 수업을 받으려면 수백만 원의 학비가 든다. 돈도 돈이지만, 매주 밀리지 않고 3학점짜리 7과목을 수강하려면 솔직히 빡세다. 남편의 이해와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나의 미래 계획과 청사진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던 남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야. 당신은 뭔가 끝까지 하는 일이 없는 거 같아. 맨날 이거 하다가 그만두고. 또 저거 하다가 그만두고. 내가 뭐 언제 당신 하는 일 못하게 말린 적은 없지만, 당신이 알아서 잘 결정해요.”


남편의 그 말은 내가 그때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나는 무엇하나 끝까지 해내는 게 없는 사람인가?' 나는 아닌데, 분명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 그 말이 뭐 대단한 말도 아닌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하는 걸 보면 내가 꽤나 억울했던 모양이긴 하다. 지금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끝까지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야.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던 거지.

이전 10화 남편의 승진과 월급인상, 엄밀하게 내 것은 아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