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남편의 승진과 월급인상, 엄밀하게 내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나의 마지막 임신은 축복과 행복의 기억으로 저장되었다. 첫 아이는 준비도 안 된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여 마음 놓고 축하받거나 드러내놓고 누리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처녀가 임신을 한 셈이었다.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처녀 때 옷을 그냥 입은 채로 숨 한번 크게 못 쉬었고, 입덧 한번 드러내놓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시어머니께서는 믿었던 당신 아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큰 충격을 받으셨고 쉽사리 받아들이시지 못했다. 평생 애지중지 키워왔던 당신의 아들이 감히 그럴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어머니는 대단히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셨고, 그 충격과 분노와 원망의 감정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퍼부으셨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찾아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나는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웠다. 점점 배가 표시가 나기 시작하고 외출하기가 어려워지자 방에서만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섭고 서러운 시간들이었다. 너무나 울고 싶은데, 마당 건너 엄마아빠가 들으실까 봐 울음소리 한번 크게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해 가을엔 비가 많이 내렸다. 천둥번개가 치며 요란하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빗방울에 젖은 감나무 잎들이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빗소리에 안심하며 배를 끌어안고 누워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곤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우는 것 밖에 없었다. 아니, 울기라도 실컷 해보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으면, 내 뱃속의 작은 존재가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엄마, 괜찮아요? 나 여기 있어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둘째 임신도 갑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임용 루프가 2000년 여름, 충격과 스트레스받는 일로 인해 빠졌고,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임신이 되었다. 둘째 임신 역시 또 딸일까 봐, 결국 또 딸이어서 그냥 둘째 임신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임신은 처음으로 계획하고 준비한 임신이었다. 아들을 임신하기 위해 날짜와 시간을 맞춰 잠자리를 가진 것이 오래도록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는 고대하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한 지 16주가 되었을 때, 병원에서는 아들임을 알려주었다. 그날 마침 아버님 환갑생일이어서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려드렸고, 나는 처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모두에게서 임신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아버님으로부터 “사랑한다 S야”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나는 아들을 임신하고서야 처음으로 행복한 임산부가 되었다.
막내는 강아지 같은 순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였다. 남자아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막내는 양쪽 집안의 기쁨이자 자랑이 되었다. 특히 종손이었고, 평생 아들에 대한 집착이 많으셨던 친정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던 관광버스 안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엄마께서는 그 이야기를 자주 꺼내시곤 한다. 어쨌든 나는 아들을 낳고서야 비로소 시댁에서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편안하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한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셋째를 낳고, 온전히 엄마로서 세 아이를 키우던 시간은 힘들긴 했지만, 정말 행복하고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막내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이 둘을 유모차 양옆에 세우고 아파트단지를 지나가면 동네 어르신들이 자주 하던 말씀이 있었다.
"아이고, 한참 손 많이 가고 힘들 때네. 그래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고 좋을 때여."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반신반의했다.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이 아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이 주는 소중함과 애틋함도 있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이는 순간이, 물론 16개월간 젖을 먹이며 젖몸살로 고생한 적도 많았고 가슴이 돌덩이로 차올라 죽을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너무나 감사하고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아이가 항상 또래보다 작더라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큰애와 둘째를 키울 때는 우리 아이가 행여 작을 새라 걱정하고, 어떻게든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썼는데... 셋째를 키우면서는 그런 안달과 조바심 대신 여유와 느긋함으로 키울 수 있었다. 오히려 '어차피 때 되면 다 할 텐데, 어차피 때 되면 다 클 텐데... 차라리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 바랄 정도였다.
그렇게 꿀 같은 시간을 1년 남짓 보내면서도 나는 계속 내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사이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결혼 전 입사했던 첫 직장에서는 생산관리 직무에서 갑자기 영업직으로 발령을 내었다. 당시 영업직을 아주 질색해하던 남편은 첫아이 백일 전, 입사한 지 약 1년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옮긴 두 번째 직장이 의왕에 있는 무선중계기 제조업체였다. 그곳에서도 2년 근무를 한 뒤, 상사를 따라 3번째 직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6개월 정도 근무를 한 뒤 다시 상사를 따라 4번째 직장으로 옮긴 후론 꽤나 열심히 오래 다니고 있었다. 어쨌든 남편은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월급이 오르고, 승진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남편의 승진과 월급인상이 더이상 기쁘지가 않았다. 물론 월급이 오르면 좀더 생활비를 여유있게 쓸 수 있으니까 가계 경제적으로는 반가운 일이긴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는 자꾸 초라해지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도대체 나에게는 무엇이 있는 걸까? 안영동 윗뜸 사는 정◯◯씨 막내딸이었고, 현재는 누구네 집 며느리이고, 또 누군가의 아내이고, 아이들 세 명의 엄마이고. 이런 거 말고, 나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나를 뭐라고, 누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뭐라는 사람일까? 도대체 나는 뭘까? 나는 왜, 어떤 존재로, 어떤 의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 나도 내 이름 석자 걸고,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나에겐 그런 이름이 없었다.
남편의 월급이 인상되고, 승진을 해도, 그건 남편의 성취이지, 엄밀하게 내 것은 아니었다!
나도 무언가 내 것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