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는 지금 남의 집에 대(代)를 끊어놓을 셈이냐?"
평생 잊지 못할 강력한 한 방이었다. 2006년 늦가을, 시어머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다 같이 모인 자리였다. 남편 형제들과 시어머님의 형제들까지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있었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어머님께서는 남편과 나를 부르셨다.
“넌 남의 집에 시집을 온 며느리인데.. 도대체 아들을 낳을 생각은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냐?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대를 이어야지!!! 지금 남의 집에 대(代)를 끊어놓을 셈이냐?”
아버님은 둘째가 태어난 직후에 공무원 명예퇴직을 하셨었다. 분명히 퇴직 초기에는 손녀 둘로 아쉽긴 했지만, 더 이상 바라지는 않으시는 눈치였다. 남편과 나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두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빴기에 셋째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겨우 둘째가 5살이 되어, 교회 선교원에도 적응해서 제법 잘 다니고 있었다. 나 역시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풍선장식 일과 리본공예 강사 일을 재밌게 하고 있었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연달아 취득한 자격증을 가지고 방과 후 아동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면, '독서지도사나 방과후 아동보육교사 일을 해봐야겠다'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님의 그 한 마디에 내 인생의 모든 계획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설마설마했다. 아버님은 6.25 전쟁 중에 아버지와 삼촌을 여의시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라셨다. 남편 역시 남동생을 잃고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결론적으로 남편은 3대 독자였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에게 바랄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은 확고하셨고 아버님도 어느새 어머님과 의견이 같아 있었다. 물론 자식은 우리가 낳는 거니까,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 편이 아니었다. 남편은 '여태껏 살면서 부모님께 효도해 드린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만은 꼭 들어드리고 싶다'라고 했다. 남편이 내 편이라면 모를까, 나 혼자 3:1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혼전임신으로 양가 부모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리고 결혼생활을 어렵게 어렵게 시작했던 터라 며느리로서 나의 입지는 전혀 없었다. 첫 아이 낳고 겨우 승낙받아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 다녀와서 큰절을 올린 후 '앞으로 평생 부모님께 순종하며 살겠다'는 말씀을 드렸던 나였다. 아니 비굴하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 스물여섯 살의 나는, '어머님이 죽으라 하면 죽는시늉조차 하겠다'는 맹세 아닌 맹세까지 했었다. 나는 어머님의 엄명에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큰 아이랑 친한 친구들 중에 외동딸인 경우가 몇 집 있었는데, 남편이 강력하게 둘째를 원치 않는 경우에는 부부간에도 고부간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둘째를 원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아내는 남편과 시부모 모두의 공공의 적(敵)이 되어 지속적으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그런 결혼생활을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한의원에서는 나를 본래 선천적으로 약골(弱骨)로 태어났다고 했다. 두 아이를 출산한 것도 이미 내 몸에는 너무 무리를 많이 한 것이니 더 이상의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내가 아이를 낳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셋째를 낳아야만 내가 두 다리 뻗고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비장한 생각마저 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셋째를, 더 정확하게는 아들 출산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중요한 협의가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여쭤보았다.
“어머니, 만약에 셋째도 또 딸이면, 저 넷째까지 낳아야 되나요?”
“그건 아니다. 셋째를 낳는 성의까지만 보여다오. 딸인지, 아들인지 성별은 묻지 않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한 사람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했다. 바로 우리 큰 딸, Y였다. 이미 두 살 터울 동생과의 관계에서 많은 기여를 해왔고, 본인과는 성향과 기질이 많이 다른 동생으로 인한 '동생 거부감'을 느끼는 Y에게 또 다른 동생이 생긴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상황일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 Y와 E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너희 둘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고 행복하단다. 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생각이 다르시단다. (중간 생략) 엄마가 사랑하는 아빠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 지내기 위해서는 엄마가 동생을 한 명 더 낳아야 할 것 같아. 엄마를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겠니?”
당시 일곱살이던 딸아이와 나눴던 내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그렇게 하여 2007년 가을, 우리에겐 한 명의 가족이 더 생겼다. 나는 그동안 중학교 리본공예 수업을 하던 걸 그만두었다. 가을에 셋째가 태어날 예정이었기에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학교수업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대신 집에서 우리 아이들과 또래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논술지도 수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실감 나게 동화구연을 해주면 아이들이 너무너무 재밌어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미리 계획한 커리큘럼에 맞춰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 아이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생각과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는 일은 너무너무 재밌었다. 한정식 뷔페에서 하던 풍성장식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달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간의 짧은 일 경험을 아쉽게 중단하고, 나는 또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