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특별한 날에 대한 기억
나는 워커홀릭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나는 실제로 이 단어를 아주 진지하게 검색해본 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워커홀릭을 '가정이나 다른 것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딱 나였다. 나는 이 '홀릭'이라는 단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중독'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몰두한다'는 의미가 좋았다. 나는 '내 일에 홀릭되었다'. 한동안 맘속으로 이 말을 되뇌곤 했었다. 일에 몰두할 때면 배고픔도, 성욕도, 그 어떤 욕구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쇼핑 욕구 조차도!
요즘 유일하게 학교에 가고 있는 고3 둘째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내 안색을 살핀다.
"엄마 아직도 제 마스크 주문 안 하셨죠?"
"아, 맞다! 너가 마스크 사달랬지? 근데 마스크 말고 뭐가 더 있지 않았나?"
"폼클렌징이요! 요새 언니 꺼 쓰기는 하는데.. 그래도 제 것 사주시면 좋죠! 그리고 영양제도 먹을 거 없어요."
내가 요새 너무 눈길 줄 새도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니 문득 밥 차려주는 내게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봇물 쏟아내듯이 줄줄이 읊어댄다. 문득 스마트폰으로 카드내역을 살펴보았다. 지난주 캠프 운영하면서 지출한 회사 카드 외엔 사용내역이 없다. 핸드폰에 설치된 2개의 쇼핑앱도 열어보았다. 마찬가지로 마이페이지에는 최근 쇼핑 목록이 없었다. 서둘러 둘째가 주문한 비말 차단용 마스크와 여드름 전용 폼클렌징, 루테인과 비타민 등을 장바구니에 담아 결재를 했다.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어느덧 올해의 3분의 2가 가고 3분의 1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님 댁에서 가져온 회덕농협 8월 달력을 뜯어내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떤 것이든 새로 시작하는 느낌은 항상 설레고 기분이 좋다. 이것저것 메모와 손때 묻은 8월 달력을 미련 없이 부우욱 뜯어내고 새로운 9월 숫자들을 바라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내가 7월 둘째 주부터 준비했던 두 번째 계약건이 성사되었기에 더욱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식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던 큰 딸이 빽하고 소리친다.
"이 놈의 집구석, 이제 너무너무 지긋지긋해."
그렇게 집을 좋아라 하던 큰 딸도 이제 더 이상 냉장고 파먹기에 신물이 났는지 제법 거칠게 내뱉는다. 손녀딸의 돌발적인 행동에 멀거니 웃고 계신 엄마를 보았다. 엄마 우리 집에 오신지 어느덧 46일째.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려야 했다. 뭔가 식구들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만한 것이 필요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오므라이스를 해야겠다!
7월 장마가 길었던 어느 날엔 호박과 감자 채썰어 전도 부쳐드렸었다. 토마토와 양배추, 달걀프라이와 베이컨, 치즈까지 두툼하게 넣어 샌드위치도 해드렸었다. 떡볶이는 몇 번이나 해드렸었는데.. 이상하게 내 손으로 음식 한번 안 해드린 것처럼 찜찜하고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오므라이스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그 어떤 음식보다도 오므라이스를 해 드려야 했다. 엄마를 오시도록 할 때, 내 계획엔 분명 오므라이스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일하느라 몰두해있다 보니, 모른 척, 아예 생각에도 없는 척 굴었었다.
"오늘 저녁으로 오랜만에 오므라이스 해 먹을까요?"
"네~ 엄마 너무 좋아요!!! 저는 이제 집밥 먹는 거 생각만 해도 너무 화가 나요. 그래도 오므라이스는 좋아요!!!"
냉장고 앞에 서서 인상 쓰던 큰 딸이 반긴다.
"응~ 좋지?! 그 언젠가 니가 해준 게,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무표정하게 좀처럼 잘 웃지 않는 엄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오므라이스는, 우리 아이들이 손꼽는 내 Best 음식이다.
오므라이스는, 엄마가 유일하게 내 음식을 기억하고, 맛있게 먹어주고, 칭찬했던 음식이다.
그리고 오므라이스는 내 생애 처음으로 초대받아 먹어봤던 아주 생소하고, 신기하고, 특별한 음식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시골이었고, 넓은 마당과 집터를 이용해 사랑채를 놓아 세를 주곤 했었다. 낮은 월세와 후한 인심 때문이었는지, 주로 돈이 없고 가난한 신혼부부나 식구 많은 대가족이 세를 들어 살았다. 그중에서 아주 갓난 여자아기를 기르던 신혼부부가 살았었다. 나는 그 아기를 돌보아주는 걸 아주 좋아했고, 내가 놀이 삼아 돌봐준 게 고마웠는지 어느 날 저녁, 아저씨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하셨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외에는 특별하게 외식 같은 것도 개념이 없던 때라, 나는 무척이나 생소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문발을 걷어치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대신 아저씨가 부엌에 계셨다. 아저씨는 직업이 요리사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좁은 부엌에서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송골송골 땀이 맺힌 얼굴로 무언가를 열심히 썰고 계셨다. 감자, 당근, 양파를 네모난 깎둑이 모양으로 썰고 계셨다. 커다랗고 깊은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미리 썰어놓은 재료들을 볶으셨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식용유에 볶아지는 양파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은 늘 끓이고, 삶고, 데치고, 무치는 음식들이었다. 기름칠이 들어가는 음식은 기껏해야 명절이나 제삿날에나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저녁식사는 내게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우선 야채를 네모 모양으로 작게 썬 방식이 생소했고, 볶은 야채를 밥과 함께 볶는 모습도 신기했다. 게다가 늘 스텐레스 밥공기와 국 대접에 익숙했던 내게 흰 접시에 담긴 음식은 완전 쇼킹했다. 처음으로 접해본 서양식 밥상이었달까. 게다가 입안에서 씹히던 감자와 양파의 식감에 새콤한 케첩까지!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사실 그날 아저씨의 오므라이스 야채는 좀 덜 익었었다. 설겅설겅 씹히던 감자가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오므라이스 야채들을 푹 익힌 걸 좋아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을 꼭 넣는다. 밥을 넣고 볶은 후에는 풍부한 맛을 위해 굴소스도 반 숟갈 넣는다. 계란은 충분히 저어서 부드럽게 풀어주고, 밥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게 푼다. 특히 엄마에게 해드릴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야채들을 익힌다. 그날 식구들은 정신없이 접시를 핥을 정도로 비웠고, 늦은 밤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온 둘째가 다 먹고서 한마디 한다.
"음~~ 역시 우리 집은 오므라이스 가게를 해야 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