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줍음 Mar 25. 2022

'게으른 완벽주의자' 의 성적표

둘째 딸 이야기

코로나 학번인 우리 집 둘째는 2년째 대학생활을 집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둘째 아이의 하루 일과는 대략 이렇다. 오전 내내 잔다. 낮 12시가 넘어서 내가 밥 먹자고 깨우면 대개는 일어난다. 이 아이도 생존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다. 나처럼 밥충이라서 특히 아침에는 밥을 줘야 좋아한다. 겨우 밥을 먹고는 다시 오후 내내 잔다. 내가 일이 있어서 집에 없는 날에는 오후 시간까지 내리 잔다. 이런 날에는 해 질 무렵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 첫 끼를 먹는다. 나는 이 아이가 필경 자다가 굶어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아이는 거의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있다.  제가 덮고 자는 이불보다도 못한 두께감으로 침대에 거의 눌어붙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휴~ 다행이다, 살아 있구나! 아니 자고 있구나!' 아이가 잠들어 있다는 안도감에 나는 다시 방문을 닫는다.


두 번째 끼니는 저녁에 먹는다. 첫 끼니를 언제 먹었느냐에 따라 저녁에 먹을 때도 있고, 늦은 저녁에 먹을 때도 있다. 그리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깨어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폰을 들고 있다. 방학 때는 거의 게임을 하고 학기 중에는 온라인 강의 영상을 보거나 과제를 한다.

요즘에는 학기가 시작을 해서 오전에도, 낮에도 종종 깨어있는 시간이 있다. 실시간 강의를 하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온다. 나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적이 있어서 이제는 익숙한 교수님의 목소리다.


이런 둘째가 첫 해 1학기를 마치고 차석을 했다. 90년대에 공대를 다닌 남편과 나의 상식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대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이자 성과였다. 아이는 '온라인' 수업방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장거리 통학을 했더라면 분명 이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다. 우리도 그 생각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래도 열심히 해준 둘째에게 '잘했다, 고맙다' 높이 치하해주었다. 그리고 반액 장학금이라는 실질적인 혜택의 기쁨을 누렸다.


2학기를 시작하며 둘째는 야무지게 9과목, 21.5학점을 담았다. 고민 끝에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 주말 알바도 했다. 과목수도 많고, 과제도 많고, 알바와 필라테스까지 가야 하는 상황. 그렇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벅찬 시간들을 보내며 매일매일 뛰어다니고, 피곤해하고, 징징대며 하소연했다. 거의 매일 자정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었고, 한 번도 여유 있게 제출한 적이 없이 늘 초치기로 과제를 제출하곤 했다. 수업은 보통 1~2주 일치씩 밀려있었고 새벽까지 깨어있다 겨우 몇 시간 자고 일어나 알바를 가곤 했다.


그렇게 악과 깡으로 한 학기를 버티며 12월 종강을 1주일 정도 남겨둔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남은 1주일간 해내야 할 과제와 시험이 무려 7가지나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는 울상이었고,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거의 패닉 상태였다. 과제는 해야 하고,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는 회식 하자며 부르고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소원하던 회식을, 분위기 조성해서 겨우겨우 만든 회식이었는데... 코로나 규제로 인해 날짜 잡기가 쉽지 않다 보니 회식 날짜도 미룰 수가 없었고, 하필 글쓰기 과제 제출일과 겹쳐서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고 싶으면 회식에 다녀오라고 했다. 과제는 초안으로 제출하더라도 아예 미제출하는 것은 아니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너무 놀라웠다. 과제 하나 정도 안 낼 수도 있고, 늦게 제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스무 살 때, 대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수업시간에 늦거나 결석하는 일, 과제 한 두 번 정도 안내는 정도는 의례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소원하던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회식을 포기하고 끝내 과제를 마무리해서 제출했다. 엄마이자 어른으로서, 나 또한 어느 곳의 교수로서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과제에 집착하도록 독려하지는 않았는데... 아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정말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제 얘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저는요, 제가 진짜 게으른 완벽주의자거든요! 저는 진짜 수업 듣고 과제하는 게 너무너무 귀찮고 싫어요. 하기 싫어서 맨날 회피하려고 자는 거예요. 그런데요 제가 진짜 이번 학기 모든 과목 출석과 과제,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어요. 제가 지금 이 과제를 하나 제출 안 하면요, 제가 그동안 이 과목을 위해 열심히 듣고 노력했던 게 다 소용없게 되거든요. 그렇게 이 과목 하나를 놓치면요, 또 제가 나머지 과목들을 위해 노력한 거, 한 학기가 다 의미 없어진다고요. 아시잖아요, 완벽한 건 완벽할 때 의미가 있거든요. 뭐 하나라도 균열이 생기면 그건 이미 완벽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하기 싫어 죽겠는데, 그것보다 이게 더 싫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제가 더 싫은 상황을 상상하면 그때부터 막 하게 돼요. 그렇게 맨날 미친 듯이 겨우겨우 해서 마감하기 직전에 제출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제가 또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느린지. 그리고 또 제가 완벽주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또 대충은 못 내요. 계속 맘에 들 때까지 퀄리티를 내려고 하니까 또 빨리 못 내고 끝까지 잡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기한 어긴 거는 하나도 없답니다. 모두 다 시간 안에 냈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제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어요!!!!"


"우와~~ 야~~ EJ야, 너 진짜 대단하다!! 엄마는 니가 맨날 징징대고 우는 소리 하길래, 너 벌써 수업이랑 과제 몇 개는 놓쳤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걸 하나도 안 놓쳤냐?!!! 너 그러면서 다 한 거야?? 너 진짜 대단하다!!!. 원래 잘하면서도 징징대는 성격인 줄은 알았는데, 진짜 대단하네!!!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너 또 장학금 또 타게? 이러다 1등 하는 거 아니니?"


"아니,  제가 생각해보니까요, 어차피 4.0이 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4.0이 넘어도 1,2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장학금을 받으려면 무조건 1등 아니면 2등이어야 해요. 지난번에 2등 했으니까. 이번에는 1등 한번 노려보려고요."


나는 사실 이날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내 딸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어떤 생각으로 자기 할 일을 해내고, 스스로의 게으름과 욕구를 컨트롤하는지. 그리고 어떤 퍼포먼스를 내는지도. 몇 주 뒤, 게으른 완벽주의자 EJ의 성적표가 나왔다. 평균 평점 4.29점, 석차 순위 1위.



우리는 EJ를 게으른 완벽주의자 대신 '과탑' 또는 '수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3 딸에게 엄마가 쓰는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