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엄마, 거울 봐봐. 아이는 혼자 샤워를 한 후 화장실 거울에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오늘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하트 속에 작은 하트 또 그 안에 더 작은 하트가 있었다. 겹겹이 그려진 하트들. 제일 작은 건 엄마 마음. 제일 큰 건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거야. 엄마 마음이 제일 작은 거라고? 괜스레 뜨끔한 내가 물었다. 그리곤 고쳐 말했다. 아~ 엄마 마음을 네가 덮어주는 거구나. 엄마도 제일 큰 하트 하고 싶어? 대답 대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가 샤워를 끝내면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주고 등 뒤쪽부터 종아리, 발뒤꿈치, 발등에 로션을 발라준다. 얼굴, 배, 정강이, 몸 앞 쪽은 아이가 알아서 바르도록 하고.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하얘지는 로션이 사라질 때까지 바르는 동안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 할 일이 세 개 남았어, 뭘까? 아~ 알겠다. 옷 입기, 옷 넣기, 물통 넣기! 아이가 벗어놓은 옷을 주우며 말했다. 실은 밖에 나가는 거 무서웠어. ‘무슨 말이지?’ 이제 밖에 안 나가도 돼서 좋다. 빨래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벗은 자리에서 그대로 남겨진 옷가지들을 치워달라고 요청하거나 그냥 내가 치우곤 했었다. 베란다 세탁기 바로 앞에 둔 플라스틱 바구니를 다른 플라스틱통으로 교체하면서 위치도 바꿔버렸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바로 넣을 수 있게. 예쁜 빨래함을 사기 전까지 베란다에 두려고 했었지만.. 왜 진작 여기에 놓지 않았을까! 남편과 아이는 화장실 옆 빨래함에 스스로 정리한다. 해달라고 요구하는 날도 여전히 있지만.
취침 준비하고 시계를 보니 9시 30분. 아직 아이는 잘 생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취침 전 독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을 생각하면 지난 8년 간의 취침 독서 보다 학교 지각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강제 소등을 하고 싶지만. 여태껏 이어온 책육아의 세월이 아까워서 책을 펼친다. 밤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기도 하고. 외식하고 돌아오는 길에 티비 보고 싶다는 걸 원하는 만큼 책을 읽어주겠다는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다. 양치질을 하고 집에 모든 불을 끄고 들어왔더니 아이가 고른 책이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약속했던 권수를 잊은 채로 아이가 들고 온 책은 무조건 읽어주자며 열심히 읽어주었다. 다 읽었네, 이제 자자. 취침등을 끄고 이불속에 들어왔다. ‘이제 다 끝났구나. 자면 돼.’ 아이가 자야 끝나는 육아. 꿀 같은 휴식을 꿈꾸고 있는데 평화를 깨는 소리.. “엄마, 몇 권 읽었어? 다 읽은 거 맞아? 다섯 권 읽기로 했잖아.” 아차.. 근데 아이는 네 권을 골랐었다. “네가 고른 만큼 읽은 건데?” “다섯 권 골라야 했어!” 며칠 전 봤던 유튜브 속 육아 전문가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의 말꼬리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 없다. 듣고 싶은 충고만 듣는 엄마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숨만 고르며 꼼짝 않고 있었다. 아이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잠들었다.
3월 2일에 개학하고 지금까지 지각 등교 중이다. 등굣길에 친구들이 없어서, 이 정도 시간에 나오는 건 늦은 거라고 2절을 시작하려는데 멀리서 아이 친구가 보였다. 아이는 손을 번쩍 들고 친구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고는 가버렸다. 오늘 아침에는, 그래서 이제 우리는 늦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냐며 3절을 시작하려는데 작년에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와 그의 엄마를 마주쳤다. 아이 엄마는 우리를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해도 통하지 않는 잔소리인 걸 알면서도 안 하자니 아이가 스스로 하지 않고. 경각심은 더더욱 없고. 하자니 아이가 괴롭고. 사실 엄마도 괴롭다. 아이의 습관을 어떻게 잡아줄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고민에 고등학교 졸업을 한 자녀를 둔 엄마가 말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다가오지 않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잠든 아이의 손을 잡으니 통통하다. 작은 체구지만 아이는 컸다. 손안에 주먹이 잡히던 작은 손이 어느새 이만큼 컸다니. 엄마품에 파고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가 8살 되고부터 습관을 잡아준다는 구실로 아이와 많이 부딪혔다. 습관 잡다가 애랑 멀어지겠다 싶어서 아이에게 심적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다. 관계가 우선이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 짜증이 올라오면 이 말을 떠올린다. 내일 아침은 어떡할까. 아이가 짜증을 내더라도 늑장을 부리더라도 웃으며 기다려야 하나? 지각은 별 일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하나? 휴우.. 답도 없는 질문 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