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도체
오랜만에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많이 편안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화가 나는건 정말 순식간이다.
상황은 이렇다.
토요일이다. 나는 출근을 할 예정이다.
오늘 집주인이 안방 형광등 수리 작업을 한다고 했단다.
토요일인데 남편과 아이들은 일찍 일어나서 안방의 매트리스와 이부자리를 치워야 한다.
아이들을 좀 돌보고, 출근 준비를 했다.
남편이 매트리스랑 이부자리를 급하게 낑낑대며 정리하고 있다.
내가 물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남편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다 했는데, 도와주긴 뭘 도와줘. 빨리 출근하는 게 도와주는 일이야."
순간 나는 당황한다. 이어서 나를 이렇게 대우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자,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은?
시나리오 1번 - 인지적으로 이게 최악임을 알고 있다. 이런 행동은 상상만 했다.
"갑자기 왜 나한테 짜증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라고 공격적으로 말한다.
이런 행동을 촉발하기 1초 전에 내 머리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남편의 짜증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고, 마치 나를 공격한다고 느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었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활성화된 편도체는 시상하부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출하게 만들고 뇌줄기를 통해 교감신경을 활성화시킨다.
이 황당한 상황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인지적 활동은(전두엽 기능) 저하된다.
나의 해마는 이 정서적으로 충격적인 상황을 중요 기억으로 저장할 것이다.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고 출근한다.
스트레스호르몬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때문에 나는 당이 땡긴다. 평상시 먹지도 않던 바닐라라떼를 주문한다.
혈당 스파이크 이후에 오히려 저혈당이 발생하여 피곤하고 졸리고 무기력하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뒷골이 땡기는 것 같고 괜히 머리가 저리저리하다.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감정이입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환자한테 괜히 틱틱거리게 된다.
'아. 오늘은 아침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몸도 엉망이고, 왜 이렇게 환자들도 다 이상해!!!'
생각하는 하루를 보낸다.
시나리오 2번 - 실제 내가 행동한 방식이다.
이럴 때는 응수해봤자 좋지 않을걸 알기에 황급히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출근한다.
출근해서도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집중이 안된다.
화를 가라앉혀보고 전두엽을 동원해서 인지적으로 상황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이럴 남편이 아닌데 왜 이러지? 나한테 불만이 있나?'
'그러고보니 요즘 남편과의 소통이 없다.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네.'
이런 생각이 든다. 갑자기 외롭고 우울해진다.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아닐까?'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남편에게 무슨 일 있나고 물어보기가 두렵다. 안좋은 말이 튀어나올까봐 무섭다.
말은 하지 않지만 괜히 차갑게 군다.
활성화된 편도체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교감신경이 과항진되어 소화기능이 떨어져 고기 먹고 체한다.
안되겠다 싶어서 생각을 전환시키고자 스쿼트도 해보고, 책도 읽어보고, 악기도 연주한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남편이 이야기한다. "이상하게 요즘 좀 기분이 우울하네."
그 한마디에 나의 공포와 불안은 사라지고 남편이 안쓰럽게 보인다.
동시에 '아, 나는 남편의 차가운 행동의 원인이 왜 나때문이라고 생각했지?'라는 인지를 하게 된다.
이로써 다음에 남편의 비슷한 행동에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것을 전두엽이 억제하도록 도울 것이다.
한걸음 더, 이런 인지적 추론까지 해볼 수 있다.
왜 나의 편도체는 이런 상황에 예민한가.
왜 이런 자극 (내가 거절당할 것이라는 것)에 예민한가.
1. 몇초~몇분 전의 영향 (잠재의식적 자극의 영향)
- 내가 남편의 얼굴에서 부정적 표정을 읽었을 수도 있다.
- 집안 문을 열어둬서 집안이 추웠다면 남편의 표정을 더 차갑게 느낄 수도 있다.
- 아이가 옆에서 칭얼거려서 순간 스트레스호르몬이 올랐다면, 더 예민해졌을 것이다.
- 이혼이나 이별에 대한 기사나 노래를 들었을 수도 있다.
2. 몇시간~며칠 전의 영향 (호르몬의 영향)
- 감각단서들에 대한 뇌의 민감도는 호르몬의 영향도 받는다.
- 만약 내가 생리전 프로게스토론 농도가 급감하는 시기라면, 더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 남편이 만약 자주 나에게 스킨쉽을 해주었다면 옥시토신이 편도체를 억제해줄 것이다.
- 업무나 사회적 스트레스가 만성적으로 있는 상태였다면, 편두체는 항상 활성화되어 있고 전두엽 기능은 떨어져서 더 공포나 불안에 예민해지고 충동적 행동을 할 것이다.
3. 며칠~몇달 전의 영향 (신경가소성)
- 만약 내가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면 편도체 안정화, 전두엽 활성화가 더 쉽게 된다.
- 남편으로부터 애정표현을 자주 경험했다면 편도체 안정화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향들도 타고난 나의 성향 수준에서 결정된다.
이제는 나의 청소년기, 유아기, 엄마 뱃속으로, 내가 속한 문화까지 확장해봐야 한다.
요즘 읽고 있는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 - 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에 대한 모든 것" 5장까지를 읽고서 나의 사례에 정리해본 내용이다. 앞으로도 나의 행동, 이해되지 않는 타자의 행동에 대해 이런식으로 접근해볼 생각이다. 그러면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소모에 에너지를 덜 쓰게 되지 않을까?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밖에 있지 않다.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