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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모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겁쟁이인 이유

by Dr 정하늘의 Mecovery

나는 겁이 많았다. 쉽게 공포나 불안을 느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나와 동생들을 큰아버지댁에 맡기고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사고가 날까봐 3박4일동안 잠을 못잤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우리를 두고 어디 가서 안돌아오는 걱정을 많이 했다.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롯데월드에 갔는데 나는 놀이기구를 하나도 타지 않았다.

친구들이 타는 것만 쳐다봤다. 스케이트장에 가도 벽만 짚고 다녔다.

엄마는 겁이 너무 많은 나를 종종 답답해했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면서.


겁이 많으면 모범생이 되기는 쉽다. 규칙을 어기면 큰일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도 잘하려고 노력한다.

겁이 많으면 새로운 도전은 커녕, 여행을 갈 때도 걱정이 많다.

'아, 거기는 소매치기가 많다던데.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신경써야 할게 뭐가 있지.'

심지어 여행지에서도 주위에 소매치기가 없나 둘러보느라고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나에게 세상은 위험이 너무 많은 곳이었다.

나를 도우려는 사람보다는, 나에게 손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이 많은 곳.

당연히,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항상 최악의 결과를 미리 연습해보았다.

최악의 결과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지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불안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상상한 최악의 결과는 생긴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을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왜 이렇게 공포에 취약하고 불안이 높을까.

엄마 뱃속에서부터, 유아기, 아동기에 부모로부터 어떻게 양육되었나.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후반의 베이비붐 세대다.

아빠는 지방 도시에서 회사생활을 했고, 엄마는 가정주부였다.

엄마는 부업으로 작은 문방구를 운영했고, 나는 문방구 뒷칸 방에서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날 쯤에는 13평 주공아파트로 이사했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신축 32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빠는 돈을 안쓰고 모으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세상은 위험이 가득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했다.

"세상은 정글과 같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한다."

"배 부르고 등 따수우면 공부를 안한다. 헝그리 정신이 중요하다."

엄마는 아빠의 규칙을 답답해했다. 두 분은 돈때문에 자주 다투었다.

부모님의 즐거운 얼굴을 본 적은 별로 기억에 없다.


나는 부모를 통해 '세상은 위험이 많은 곳이며, 무시당하지 않는 힘을 키워야 한다.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프레임을 갖게 되었다. 그게 나의 공부를 하는 동기였다. 성공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공부했다.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의 모은것"에서는 말한다.

인간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꿈을 품어야 하는지 가르친다고.

아이는 부모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배운다고.

아동기에 뇌가 접하는 모든 경험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뇌에 영향을 남긴다고.

유전자의 효과는 철저히 맥락의존적이라고.

(나와 막내동생의 성향이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해서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유전적 관점과 첫째와 막내의 차이, 양육된 환경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막내는 부모님이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둘째인 나의 여동생은 또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의 부모는 왜 저런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을까는, 또 부모의 어릴 때부터 시간여행을 떠나봐야 안다.

내가 속한 문화인 한국의 세대정신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까지.


나는 과연, 내 자녀들에게 어떤 세계관을 물려주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들을 낳고 5년 뒤 딸을 낳는 사이 변화한 나는, 또 각각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이런 생각을 하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것 또한 그 아이의 운명이겠지만.


가장 좋은 육아는 말 대신 내가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가 행동했으면 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히고 싶으면 내가 읽고, 운동을 했으면 한다면 내가 운동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면, 내가 그렇게 해보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에게 좋지 않은 세계관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것.

나를 제대로 돌보는 것에서 육아가 시작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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