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급브리핑

욕구, 불만족 그리고 크립토나이트 

열세 번째 B급브리핑

by LOVEOFTEARS

<일러두기>

‘B급브리핑’ 글의 형식은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님의 ‘앵커브리핑’ 형식을 참조하여 작성했으며, 더불어 이 형식을 빌려 집필하는 것을 앵커님께 허락받았음을 알립니다.



Tears의 B급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장단점에 관한 논의는 지금도 뜨겁습니다. 물론 그 문제를 두고 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를 물어 일생최대의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장단을 두고 논하는 것은 아마도 빈익빈부익부와 같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직 남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바로 ‘노력한 만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화 <개미와 배짱이>에서의 결론처럼 말입니다. 하긴, 요즘은 이런 잣대를 들이밀기엔 어려운 실정이기도 합니다.



사회에서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그러니까 고난이 있어야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피면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짜로 주어져 있습니다.



햇빛, 어둠, 비, 눈, 바람, 공기…



네. 이것들을 열거하니까 앞서 말씀드린 게 정말이지 겸연쩍게 여겨지는군요. 어쨌든 이것들 모두는 자연의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 안에서 사람은 마치 우주 한 가운데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멀리 보이는 조그만 푸른 점처럼 보일 텐데요. 이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무료로 배포하는 무형의 자선사업가입니다. 신은 자연을 만드셨고, 그로 인해 인간은 그 안에서 편안히 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을 향해 끝없는 탄성과 박수를 보내도 그 안에 녹아들어 조화롭게 살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장애인입니다. 사람은 사람이되 겉으로 보이기는 온전하다고 볼 수 없는 존재는, 그래서 더더욱 사회 속으로와 자연으로의 녹아듦을 깊이 갈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장애인이라는 타이틀로 살아도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살아 온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의 저자이자 교수인 오토다케 히로타다 씨입니다. 그의 저서인 오체불만족은, 저의 학창시절엔 꼭 읽어야 했던 필독서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읽기 싫어했던 책 중 하나였지만, 당시 선생님의 천리안과 같은 레이더망에 걸려 울며 겨자 먹기로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동기야 어떻든, 그 책을 읽었을 당시에 저는 센세이셔널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그래서 세상에선 동정 받아야 할 사람이 정반대의 마인드로 일관하며 당당히 살아가는 그 모습은, 장애인 관련 영상이나 인쇄물을 정말 싫어하는 제 마음에도 충만하게 귀감이 됐습니다.



오체(五體)… 즉, 온 몸이 불만족스럽다는 선전포고 속에 들어있던 그의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신체적 불만족이 일상의 불만족 역시도 가져 오지만 그렇다고 해도 굴하지 않겠다던 당찬 젊은이. 그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 장애인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두의 영웅이 된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조금씩 멀어져갔고, 오랜 시간이 흘러 오늘(3월 24일)에야 다시 그의 이름을 보게 됐는데, 오늘은 결코 이전에 받은 영웅의 칭호에 걸맞지 않은 소식으로 다시 회자됐습니다.



잘못은 누구라도 할 수 있고, 그것이 오늘 하루 종일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던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고 단언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었고, 더불어 다수의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 역시도 그의 능력이라고 받아들이면, 비난할 거리도 안 되겠지요.



또 어떤 이들은 심장은 하나인데 하나 이상의 마음을 품어 신중치 못하게 행동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쌓아 온 명예에 금이 갔다는 것 등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고요.



그러나 그것 말고 그에게 진짜 잘못이 있다면 아마 이것일 겁니다.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장애를 벗어나고자 했던, 그리고 그 시간을 꿈꿨던 많은 장애인들에게 자신은 ‘이미 장애를 극복했다’며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해 잠시 동안 자책하게 만들고는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은 그저 남들과 다름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알렸다는 것이 더 큰 잘못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그에게 위험하게도 감히 ‘수퍼 장애인’이란 칭호를 붙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잘못의 명분을 적용해야하는 것은 아닌지요… 너무 가혹할까요?



그도 그럴 것이 모두의 영웅인 수퍼맨은 렉스 루터의 간교한 꾀 때문에 크립토나이트의 소굴로 들어가 위기를 겪긴 하지만 개인의 욕구 때문에 많은 이를 실망시키지는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오토다케만의 크립토나이트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의 B급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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