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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Dec 16. 2016

별 것 아닌 인내

시시한 아픔에 더해진 별 것 아닌 인내ㅡ



“아프다고, 힘들다고, 이제 그만 좀 하자고….”



신음도 내 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무언으로 참아도 보지만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다 견뎌내 봐도 힘겹다. 삶의 조각들이 바람의 흩날려 본래의 모습조차 잊게 될 때는 이미 늦었을까?



남루하고 해어진 자국들을 다 지워내기에는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내 몫이니 다 감당해 낼 수 있다. 다 괜찮다. 서른의 중간, 그중에서도 꼭짓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그깟 겉치레쯤이야 무시할 수 있다.



허나 심장 한켠이 마구마구 질척댄다. 마치 어린아이가 사고 싶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아 시위라도 하듯이 그렇게. 



부질없는 줄은 알지만 조용히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매번 아프다고는 안 해. 사실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엄살 부리기 싫거든.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란 게 정말 아플 때도 있잖아. 티는 내지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아픔들. 적어도 그 아픔을 마주하면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누구나 사람은 아프다. 경중의 차이를 논하곤 하지만 사실 좀 우습다. 아픔에 그 따위 게 무슨 소용인가. 그저 아프면 아픈 거고, 나으면 다행인 거지.



그런데 세상 이치가 그렇지가 않다. 대단한 아픔은 없지만 시시한 아픔은 존재하니까



적어도 그 시시한 고통들에 신음해야 하는 영혼에겐 가엾기보다 쪽팔림이 먼저다. 그리고 타인은 아픔을 아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것을 투영시킨다. 그저 그들의 눈길엔 언제나 무언가가 걸려 있다. 



순수함을 잃었다. 그러니 시시함에 못 이겨 신음하는 당사자는 쪽팔림이 우선일 터



어쩔 수 없이 보통의 아픔과 시시한 아픔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 시시한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어줬으면 한다. 






가만히 놔둬주는 아량…



이렇다 저렇다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입에 바른 소리를 쏟아내는 것은 당장 시시한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꼴



개구리 왕눈이에게 가장 큰 적수는 투투가 아니라 언제 날아 튈지 모를 짱돌 하나가 아니었을까?



시시한 아픔에 더해진 별 것 아닌 인내ㅡ



그 인내로 힘겨움을 다 가릴 순 없고, 치워낼 순 더더욱 없겠지만 최소한 그 인내의 형태는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아픔이 시시해서 조소할 순 있어도 이겨내기 위한 인내의 행위, 그 발버둥만큼은 가장 최선의 것일 테니까….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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