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아픔에 더해진 별 것 아닌 인내ㅡ
“아프다고, 힘들다고, 이제 그만 좀 하자고….”
신음도 내 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무언으로 참아도 보지만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다 견뎌내 봐도 힘겹다. 삶의 조각들이 바람의 흩날려 본래의 모습조차 잊게 될 때는 이미 늦었을까?
남루하고 해어진 자국들을 다 지워내기에는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내 몫이니 다 감당해 낼 수 있다. 다 괜찮다. 서른의 중간, 그중에서도 꼭짓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그깟 겉치레쯤이야 무시할 수 있다.
허나 심장 한켠이 마구마구 질척댄다. 마치 어린아이가 사고 싶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아 시위라도 하듯이 그렇게.
부질없는 줄은 알지만 조용히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사람은 아프다. 경중의 차이를 논하곤 하지만 사실 좀 우습다. 아픔에 그 따위 게 무슨 소용인가. 그저 아프면 아픈 거고, 나으면 다행인 거지.
그런데 세상 이치가 그렇지가 않다. 대단한 아픔은 없지만 시시한 아픔은 존재하니까
적어도 그 시시한 고통들에 신음해야 하는 영혼에겐 가엾기보다 쪽팔림이 먼저다. 그리고 타인은 아픔을 아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것을 투영시킨다. 그저 그들의 눈길엔 언제나 무언가가 걸려 있다.
순수함을 잃었다. 그러니 시시함에 못 이겨 신음하는 당사자는 쪽팔림이 우선일 터
어쩔 수 없이 보통의 아픔과 시시한 아픔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 시시한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어줬으면 한다.
“가만히 놔둬주는 아량…”
이렇다 저렇다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입에 바른 소리를 쏟아내는 것은 당장 시시한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꼴
개구리 왕눈이에게 가장 큰 적수는 투투가 아니라 언제 날아 튈지 모를 짱돌 하나가 아니었을까?
시시한 아픔에 더해진 별 것 아닌 인내ㅡ
그 인내로 힘겨움을 다 가릴 순 없고, 치워낼 순 더더욱 없겠지만 최소한 그 인내의 형태는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아픔이 시시해서 조소할 순 있어도 이겨내기 위한 인내의 행위, 그 발버둥만큼은 가장 최선의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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