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하고 싶은 지랄은 많이 남았다
• 자유분방함과 무분별의 차이
• 적극과 나댐의 차이
• 피할 수 없어 즐기는 것과 억지로 붙어있는 것의 차이
이 오묘하고 분간키 어려운 한 끗의 간극은 아마도 세상사는 모두가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 인류의 지성은 문명의 발전 덕에 그야말로 최대치의 이르렀다지만 이 같은 세세한 차이는 걸러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확연한 차이점을 대면서 다르게 정의한다고 한들 실은 말의 장난일 뿐. 애매하기만 합니다.
사람은 예의를 배우고 도덕을 지키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집니다. 그러나 그 구분이라는 것 역시 인간에게와 신께 죄를 짓지 않는 선에서는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오늘도 제 심장에선 반항의 기차가 레일을 따라 움직입니다.
지랄 총량의 법칙
지랄은 본디 간질을 속된 말로 이르는 말이지만 그보다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일컬을 때 많이 쓰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욕이지만 마냥 욕설로만 볼 수 없는 단어죠.
그런데 지랄에도 총량 법칙이 있다?
저의 경우는 이 법칙을 드라마에서 처음 접했지만 그보다 먼저는 어느 교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이라고 하네요.
그 말은 짐작하시다시피 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다 다르다는 것이죠.
지랄
과거에 얼마큼 했고, 또 앞으로 얼마큼 그 양이 남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확실히 젊음은 여전히 저의 소유이며 향후 몇 년 아니 수십 년은 남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몸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점점 쇠해가겠지만 마인드만큼은 필시 롱런할 테니까요.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지랄의 타이밍은 분명 정해져 있을진대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젊음은 지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찬란한 시기입니다. 난무하는 규제와 쓸데없는 자제는, 다시 못 올 그 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개인적 이야기를 하자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진즉부터 저는 자유와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일분일초 생존의 늪을 걷는 제 또래의 수많은 청춘들에 비교하면 팔자 좋은 타령에 불과하고, 핑계에 지나지 않겠지요. 허나, 한편으론 타인이 걸어갈 필요 없는 그 영역을 가야만 할 때 생기는 애로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장애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똥오줌 배출하는 그 일은 지금도 일상의 큰 대사(大事)입니다. 뿐만 아니라 봄의 한가운데서 벚꽃 구경하기 힘들었고, 록키의 열정 어린 스텝처럼 아침에 조깅하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사람 지켜주기에 모자랐고,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불철주야 희생하신 부모님께 제대로 된 자식 노릇 못 해 드린다는 그것.
잃어서는 안 되는 그것들을 잃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세월이 더 흐르면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자제할 일을 만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염원하는 것은 어느 교수님의 책에 실린 그 말처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하늘 본향으로 가는 그 시간 전까지 탈탈 털어 다 쓰고 가고 싶습니다.
전설의 뮤지션 스팅의 ‘Fragile’(프래즐)이란 노래 가사와 같이, 사람은 그 연약함이 때때로 비마저도 비웃을 정도라지만 설사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장면을 재차 마주하게 되더라도 현재의 이 결심은 지켜내고 싶습니다.
오늘 밤은 일탈이나 자유 수호와 같은 거창한 것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할 수 있는 ‘지랄’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