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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Dec 25. 2022

순례 7일 차 : 로그로뇨를 향하여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26 수요일 Walking D+7 

로스 아르고스(Los Arcos) -> 로그로뇨(Logroño) 약 28km


어느덧 걸은 지 일주일 째가 되었다. 이곳에 와서 한 것이라곤 걷고 먹고 자는 것 밖에 없는데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제 와인과 맥주를 먹고 곯아떨어진 나는 다음 날 로그로뇨(Logroño)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H오빠와 로그로뇨까지 동행을 하기로 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연박을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순례 7일 차 만에 처음으로 하루 온종일 쉬는 날을 맞이했으며, 5명이서 출발을 하게 된 날이었다. (로그로뇨에서 연박을 한 이유는 그곳이 대도시이기 때문이다!) 


28km의 짧지 않은 길이었다. 사실 동키(delivery service)로 숙소까지 배낭을 보내도 되었으나, 나는 나를 한계로 몰아넣고 싶은(?) 무모한 욕심이 있어서 약 10kg의 배낭을 그대로 가져갔다. 

하늘이 깜깜할 때 출발해,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을 걸으면서 볼 수 있었다. 머지않아 해가 다 떴을 땐, 다음 마을에 도착을 한 상태였고 작은 카페에서 조금 휴식을 취했다. 신발을 풀어 발을 편안히 해주고, 목도 축이고 잠깐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해주었다. ('출발하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고 나가자'라고 말하던 우리였는데, 매번 까먹었다)

아직은 어두운 하늘과 우리가 잠깐 쉬었던 작은 카페

 이제 몸도 조금 풀렸겠다 신발끈을 다시 꽉 조이고 출발을 했다. 쏟아지는 햇빛과 쭉 뻗은 길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듣던 대로 스페인의 햇살은 뜨거웠고 너무 더웠다. 진정 10월 말의 날씨가 맞나? 싶었다. 뜨거운 날씨 속, 오늘 걷는 길이 길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내가 너무 뒤처져 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내 앞에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보는데 H오빠를 비롯한 사촌언니와 K언니, B언니도 너무 잘 걷고 있는 거였다. 순간, 내가 너무 못 걷는 것 같아서 스스로 원망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슬픔과 자책으로 나를 채찍질하고 있을 때, 한국에 있는 13년 지기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졌었다.


모든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다르니, 지금 걷는 순례길에서도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사람과 뒤처지는 사람들로 말이다. 그중에서 나는 후자였다. 평지와 오르막 그리고 내리막이 있던 로그로뇨로 가는 길에 홀로 뒤처져 걷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기분은 꽤나 슬펐고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진 틈을 타, 결국 나는 한국에 있는 13년 지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여보세요?!"


다행히 전화 연결이 되어서 오랜만에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듣고 싶은 목소리라 그런지 더욱 반가웠다.


순례길이 어떠냐는 친구에 말에 나는 '힘들어'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 그간 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근황을 얘기하며 자잘한 얘기들을 먼 거리를 넘어 주고받았다. 나의 투정도 받아주는 친구가 있기에 힘내서 언니들과 오빠가 있는 곳까지 잘 따라갈 수 있었다.

흔한 순례길 풍경.jpg

조금 가팔랐던 언덕 내리막길을 내려와 점심을 먹을 식당에 갔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가자 왼쪽으로 한 식당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긴 테이블과 의자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밖에 놓인 식당 메뉴판을 보니 12유로의 코스 요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는 짧은 생각 끝에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고 밖에 있는 테이블 옆 의자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앉았다. 조금 기다리니 한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애피타이저 - 본식 - 디저트 - 음료까지 주문을 받고 홀연히 사라진 정말 친절하신 웨이터 였다)


이곳은 인심 좋은 스페인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스파게티를 고를 수 있었고 난 거기에 본식은 미트볼 그리고 디저트는 아이스크림, 음료는 와인을 골랐다. 분명 아침으로 어제 먹다 남은 닭볶음탕을 먹었지만, 배가 고팠던 나였다. 와인과 함께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그 후에 큰 미트볼 3개와 감자튀김 마지막으로, 후식이 등장했다. 쉬면서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고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서 소화를 시킬 새도 없이 다시 바삐 움직였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배낭을 멘 채 숙소까지 가는 걸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마음과 같이 오늘의 숙소 또한 그러했다. 

애피타이저 - 본식
후식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 진짜 맛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걸어가는데 점심을 많이 먹은 탓일까 배가 조금씩 아파왔다. 심지어 배낭을 메니, 골반~복부에 고정시키는 띠가 배를 압박하여 더욱 속이 쓰렸었다. (이때부터 점심은 간단하고 허기가 지지 않을 정도로만 먹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를 압박하던 띠를 살짝씩 풀어주며 천천히 걸었다.   


가다가 너무 덥고 지칠 땐 중간에 우비를 깔고 쉬었다.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르면서. 해가 늦게 지는 덕분에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지만, 더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슬슬 아파오는 발을 참아가며 계속 걸은 끝에 드디어 로그로뇨에 도착을 했다. 숙소까지는 또 걸어가야 했지만, 로그로뇨에 도착한 것과 이곳에서 하루 더 쉰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여기까지 동행했던 H오빠와는 헤어지고 각자의 숙소로 걸음을 돌렸다. 깔끔하고 예쁘게 정돈된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숙소에 다다랐다.

이틀을 묵는 숙소라 내일 다시 짐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긴 거리였지만 큰 탈없이 모두 숙소까지 걸어와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묵는 4인실 숙소는 흰색 인테리어로 복도가 길게 있었으며 테라스도 딸린 구조였다. 그동안 있었던 알베르게와는 차원이 달랐고 주방도 깔끔했다. 뭐니해도 주방이 있으면 사 먹는 것보다 직접 해 먹는 게 훨씬 저렴해서 우리는 그날 저녁을 해 먹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앉아 지치고 힘든 몸을 좀 녹였고, 차례로 씻은 다음에 숙소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갔다. 마음 편히 마트 구경도 하면서 우리가 저녁에 먹을 와인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여태껏 걸었던 날 중에 로그로뇨로 가는 오늘이 제일 힘들었지만, 다 걷고 숙소에 도착을 하니 너무 후련했고 또한 여행 중에 음식을 해 먹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늦은 밤 언니들과 이런저런 진솔한 얘기들을 듣고 나누며 인상 깊은 순례 7일 차의 날을 마무리했다.  

로그로뇨로 가는 순례 7일 차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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