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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Dec 20. 2022

순례 6일 차 : 100km뒤에 있는 만남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25 화요일 Walking D+6 

에스떼아(Estella) -> 로스 아르고스(Los Arcos) 약 21.3km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눈을 떠보니 아침 8시였다. 생각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침은 먹어야 했기에 공용 주방으로 내려가서 B언니가 만들어준 따끈한 토스트를 먹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의 건강이다. 같이 온 4명이 안 아프고 무사히 완주를 하는 게 베스트이지만.. 오늘로써 그것이 깨져버렸다. 순례 시작부터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해대는 나와 피레네를 건너오고 나서 열이 난 B언니, 수비리(Zubiri)에서 컨디션이 안 좋아진 K언니 그리고 오늘 사촌언니의 말 못 할 통증까지. 이로써 모두 다 한 번씩 아픔을 경험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는 사촌 언니의 말에 오늘은 나와 K언니, B언니 총 셋이서 걸어가기로 했다. 사촌 언니는 병원 검사를 받은 후 택시로 이동을 할 계획이라 그 편으로 우리의 배낭을 실어 보냈다. 오늘은 로스 아르고스(Los Arcos)까지 걷는 날이었고 우리는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밖으로 나온 후 부지런히 움직였다.


로스 아르고스로 향하는 길은 여느 길과는 다르게 꽤 특별했다. 에스떼아(Estella)의 다음 마을인 아예기(Ayegui)라는 곳에 무한으로 마실 수 있는 무료 와인 수도꼭지가 있었고, 또한 생장에서 약 100km 지점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우리가 걸어온 지 벌써 100km나 되었다는 말이었다!)


넓고 깨끗한 공원을 가로질러 조금 걷다 보니 금세 아예기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에는 '헤수스'라는 이름의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이 있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그곳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우리는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장인의 솜씨가 물씬 나는 장식품들이 많았고, 다른 한쪽엔 순례자들이 쎄요를 찍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헤수스의 대장간

구경도 하고 쎄요도 받은 우리는 대장간을 나와 그다음 무료 와인 수도꼭지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고 나는 직감적으로 '아! 저기가 무료 와인이 있는 곳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워낙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 성수기 때는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했다. 다행히 지금은 비수기라 그곳엔 자전거를 타고 온 3명의 보이들만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한 후, 그들이 충분히 와인을 즐길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후에 우리는 기다렸던 와인을 맛보았다. 따로 병을 가져오지 않아서 가지고 있던 물 뚜껑으로 와인잔을 삼아 한 모금씩 마셨다. 수도꼭지를 틀자 붉은색 물이 콸콸콸- 하고 쏟아졌다. 분명 모양은 수도꼭지인데, 거기서 나오는 건 물이 아닌 와인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 찌릿-하고 목을 타고 넘어오는 와인의 맛이 꽤나 진했다. (길을 걷는 동안 이런 재밌는 이벤트가 있다면 더욱 신나게 잘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ㅋㅋ) 공짜 와인을 마시고 기분 좋게 다음 마을로 걸어갔다. 자갈길은 나의 발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약간의 와인과 맑은 날씨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아예기의 무료 와인 수도꼭지와 평화로운 순례길

길은 끝없는 자연의 향연이었다. 


약간의 언덕을 지나고 작은 포도밭을 지나 한 바르(Bar)에 도착을 했다. 생각보다 큰 바르엔 여사장님 한 분과 동네 주민 아저씨들 여럿이 계셨으며, 순례자인 우리는 들어가서 음료를 시키고 잠시 몸을 쉬었다. 점심을 먹어야 했으나 마땅히 먹을 음식도 없었고 우리가 가져온 머핀도 있었기에 일단 마실 것만 주문을 했다. 우리는 쉬면서 어디서 머핀을 먹어야 할까? 하고 의논한 끝에 그냥 길을 걸으면서 머핀을 먹자! 하고 결론을 내렸다. (외부음식이라 이 바르에서 먹기가 조심스러웠다)


순례길에서는 바르마다 쎄요(도장)가 있다. 우리는 충분히 쉰 후 쎄요도 받고 나와서 목적지인 로스 아르고스까지 다시 걸었다. 중간에 머핀을 꺼내서 걸으면서 먹고 멋들어지게 있는 갈대밭에서도 사진도 찍으면서. 걷고 쉬고를 반복하면서 나름 각자의 순례길을 즐기고 있는 우리였다. 로스 아르고스까지 이제 한 자릿수의 킬로미터가 남았을 무렵, 마지막 쉼을 했다. 주변에 마을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바르가 없었다. 그래서 앉을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간신히 엉덩이를 붙일만한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물도 마시고 과자도 먹으면서 갈증 해소도 하고 약간의 허기도 달랬다. 

우리의 소중한 비상식량

이제 더 이상의 쉼은 없었다. 숙소까지 직진을 해야 했고,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끝없는 자갈길을 걷고 드넓은 평야를 지나 드디어 우리 숙소가 있는 로스 아르고스에 도착을 했다. 마을 초입엔 닭과 염소, 오리 등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숙소엔 미리 가 있었던 사촌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는 공립 알베르게인 이 숙소에는 젠틀하신 안내 도우미 할아버지께서 숙소 이용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그분이 입고 계신 파란색 티와 가슴에 붙어있던 명찰 그리고 다정하고 단단한 말투가 그를 더욱 프로페셔널하게 만들어 주었다. 


숙소에 도착을 하니, 맨 처음 바욘에서 생장으로 갈 때 같이 택시를 타고 이동했던 H오빠가 있었다. 또한 그동안 걸으면서 마주치지 못했던 여러 명의 순례자들이 있었고 한국인 분들도 꽤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외의 순례자들을 만나니 참 신기했다. 


하루 끝의 마무리는 뭐니 해도 저녁식사이다. 우리가 오는 동안 사촌 언니는 그새 한국인 2명과 친해져 안면을 텄고, H오빠 포함 그분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한국인 2명 중 한 명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이 저녁 식사를 위해서 와인을 사주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에 보답으로 김치와 닭볶음탕을 만들어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로스 아르고스에 도착한 날 / 이날의 잠자리 그리고 모두 함께 한 저녁 식사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신기하면서도 너무 반가웠다. 또한 내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처음엔 말주변이 없었지만, 따듯한 밥과 술이 들어가니 마치 어제도 본 사람인 것처럼 모두 다 친해져 있었다. 그렇게 순례 6일 차의 날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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