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에스떼아(Estella) 약 22km
순례길을 걷다 보면 날짜와 요일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다. 일요일이 지나 벌써 월요일이 되었고, 오늘은 에스떼아(Estella)까지 걷는 날이었다. 7유로의 파란 침대에서 벗어나 아침 일찍 길을 나선 우리는 동네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확실히 아침을 먹고 출발해야 잘 걸을 수 있다는 모두의 생각이었다.
사촌 언니와 나
공립 알베르게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니 진한 초록색 벽이 인상적인 한 바르가 나왔다. 아침 일찍 문을 열었고 가까우니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갔다. 또한,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들어간 것 같기도. (왜냐하면, 마을마다 거리가 꽤 있는 경우가 있고 비수기라서 문을 닫은 바르가 좀 있기 때문에... 있을 때 먹어두고 밀어 넣어야 한다)
아담한 내부에는 사장님으로 보이는 남자 1분과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 1분이 계셨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배낭을 내려놓고 바로 주문을 했다. 아침이라 갓 나온 빵들이 많이 없었지만, 토스트는 가능하다는 말에 나는 바로 하몽이 곁들여진 토스트 1개와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곳은 작지만 화려했고 나의 눈을 사로잡기에 너무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주문한 하몽 토스트가 나왔다. 유일하게 나만 하몽 토스트를 시켰는데 그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었다. 비주얼에 한 번 놀라고 크기에 두 번 놀라고 맛에 세 번 놀랐다. 신선한 하몽의 맛이 휙! 하니 내 혀를 감쌌다.
초록색 대문의 바르와 엄청난 하몽 샌드위치
정말 친절하셨던 직원분과 좋은 아침을 보내고 힘차게 걸었다. 마을을 빠져나오고 시간이 점점 지나니 파란 하늘이 점점 진해졌다. 날씨도 너무 좋고 가는 길도 참 예뻤다. (기분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뜨거운 하늘 아래 쭉 걷고쉬고를 반복하며 하나씩 마을을 지나쳐갔다. 조금만 걸어도 금방 더워지는 날씨에 입고 있던 후리스를 벗고 반팔로 줄곧 걸었다. 흙길과 아스팔트길을 번갈아 걷다 보니 한 마을이 보였다.
이 마을 이름은 시라우끼(Cirauqui)라고 하는데, 정말 높은 곳에 있어서 올라가는데 꽤 힘이 들었다.
길은 나름 매끄러우나 계속 오르막이 있었다. 작은 포도밭을 지나고 길을 하염없이 걸으니 드디어 마을 입구가 나왔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계속 오르막의 연속이랄까...
"마을은 참 이쁜데.."
라면서 혼자 속으로 궁시렁대며 올라갔다.
시라우끼(Cirauqui) 마을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며 얼마나 올라갔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오르막의 끝이 보였다. 그 끝에 다다르니 그곳에는 쉴 수 있는 작은 공간과 화장실 그리고 쎄요(도장)를 찍을 수 있는 노란색 우체통이 있었다. 우리는 쎄요도 찍고 화장실도 갔다 오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짧은 휴식 후, 엉덩이를 떼고 다시 걸었다. (엉덩이 떼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풀과 나무, 흙으로 둘러싸여 내내 자연과 함께했다.
시라우끼 마을을 지나니 마땅히 쉴 마을도 없었고 바르도 없었다. 쉬지 않고 걸은 우리는 결국, 길 중간에 또 우비를 펴고 앉아 쉬었다. (나는 쉴 땐 주로 신발을 벗고 멍을 때리곤 했다) 아직은 한 번에 오래 걷기 쉽지 않아 중간중간 짧게 자주 쉬어주었다. 그렇게 쉬다가 우리가 먼저 지나쳐 온 순례자를 만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이제 일어나서 또 걸을 시간이 왔다.
순례는 걷고 쉬고 먹고 자고의 꾸준한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로르카(Lorca)라는 마을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바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확히는 한국인 와이프와 스페인 남편이 운영하는 바르지만) 여기까지 걸어온 우리였지만 마땅한 점심을 아직 먹지 못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쉴 생각으로 쭉 직진했다. 딱히 쉴 곳도 없어 바닥에 우비를 깔고 쉰 우리는 그 바르를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었다.
열심히 걸은 우리는 도착해서 바로 한국인 사장님과 수다를 가졌다. 사장님께서는 순례자 한국인인 우리를 친딸처럼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 그런데
도착한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식사가 안 된다는 거였다. 재료가 다 떨어져서 음료만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너무 아쉬웠지만, 바닥이 아닌 의자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던 때였다.
길을 걷다 보면,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왔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조그만 것 하나하나가 다 감사하고 소중하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셨던 사장님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짐을 챙겨 뒤돌아서 가는데 '다시는 만나기 힘들겠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좋은 이별은 없는 것 같다, 이별은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며 나도 모르는 감정에 잠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을 갖고 미지의 동굴을 통과하며 다음 마을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다른 한국인 순례자분을 마주쳤었는데, 내 뒤에 오던 K언니와 B언니한테 무언갈 주는 모습을 보았다.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물집으로 고생하는 K언니한테 골무를 준 것이었다. 선뜻 자신이 갖고 있던 걸 내준 그분의 친절함에 감동을 한 우리였다. (나중에 그 순례자분은 우리들 사이에서 골무 오빠로 불리게 되었다)
로르카 바르 / 미지의 동굴 / 감동의 현장
유독 친절한 분을 많이 만난 이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 얘기는 목적지인 에스떼아(Estella)에 거의 도착한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로 들어가는 에스떼아 골목은 너무 예뻤다. 생각보다 마을이 커서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걸어 도착한 에스떼아!
가방의 무게까지 더해져 더 힘든 하루였던 24일 월요일이었다.
숙소는 깨끗하고 화장실이 딸린 4인실에 공용 주방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우주선 같은 엘리베이터와 공용 세탁실도 있었다) 그 주방이 생각보다 깔끔하고 넓어서 우리는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기로 했고 근처 까르푸에서 장을 봐 고단하고 재밌었던 오늘을 안주삼아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음식에 진심이며 수준급으로 요리를 잘하는 사촌언니가 쌈장을 만들고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