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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Dec 15. 2022

순례 3일 차 : I'm a lucky girl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22 토요일 Walking D+3 

수비리(Zubiri) -> 팜플로나(Pamplona) 약 22.8km


점점 걷는 킬로미터가 늘어나는 게 보인다. 어제의 일들을 마음에 간직한 채 오늘의 목표를 향해 다시 정진했다. 오늘로써 만나는 스페인의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나. 그곳엔 우리를 맞아줄 아늑한 숙소가 있었다. 우리는 떠나기 전에 미리 다음 날 숙소를 결정하곤 했는데(비수기라 숙소가 많이 없었다.), 수비리에서 많은 얘기 끝에 이번 숙소는 알베르게도 아닌 호스텔도 아닌 무려 호텔로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숙소에 따라 쉬는 마을이 정해지곤 했다.) 순례 3일 차만에 호텔이라...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호텔로 숙소를 결정하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우선, K언니의 몸 상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아야 다 같이 걷는데 도저히 팜플로나까지 걸어갈 기운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루는 푹 쉴 겸 호텔로 숙소를 잡게 되었고 또 하나, 다른 지역의 같은 호텔에 비해 팜플로나 지역의 호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 끝에 호텔 1박을 하기로 결정했고 빠르게 결제를 완료했다. 


대도시로 가는 길은 나와 B언니 그리고 K언니와 사촌언니로 나눠졌다. K언니와 사촌언니는 택시를 타고 이동해 먼저 호텔로 가있는다고 했고, 남은 우리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택시로 이동하는 그녀들은 친절하게도 우리의 배낭을 택시로 호텔까지 옮겨준다고 하여 나와 B언니는 몸 가뿐히 출발할 수 있었다.


아침은 가볍게 어제 숙소 근처 마트에서 사 온 작은 컵라면과 삶은 계란 1개를 먹었다. (아, 보카디오 절반 남은 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방 안 구석에 철푸덕 앉아서 다 먹어버렸다.) 벌써 해가 나와 우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비록 우리가 선/후발대가 나눠지긴 했지만 시작은 다 같이 출발을 했었는데, 처음으로 시작부터 둘이서만 걷게 되어서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의지할 것은 서로 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행히 어제와는 다르게 날씨가 너무 좋아서 걷기엔 무리가 없었다. 파아란 하늘에 배낭 없는 몸이라니. 걸음은 사뿐사뿐하며, 몸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순례 3일차 아침

순례를 시작하고 청명한 하늘은 실로 처음 보았다. 하늘이 파라니, 풀들은 더욱 짙은 녹색 빛을 띠고 있었다. 덕분에 나와 B언니는 속도를 내며 걸어갈 수 있었다. 바닥엔 자갈길이, 주위엔 풀과 나무뿐이었지만 그 모든 게 그림이었다. 걸으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생각보다 보기 힘든 통통한 거위도 보았다.

길도 험하지 않고 평탄하니 중간에 사진도 찍으면서 즐겁게 걸어갔다. 굴곡 없이 쭉 이어진 길은 주위 풍경처럼 편안해 보였고, 맑디 맑은 날씨는 나의 기분을 대신 나타내 준 것만 같았다. 

날씨가 청명했던 순례길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마땅히 점심을 먹을 곳이 없어서 굶주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구글맵에 나오는 식당들은 다 거리가 멀거나 그 수도 별로 없었으며 하물며 영업을 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발견한 식당은 문을 닫아버린 지 오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에겐 약간의 음식이 있었다. 혹시 모를 이런 상황을 대비해 아침에 비상식량을 챙겨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은 마실 물과 삶은 계란 2개, 기내에서 챙겨 온 과자 그리고 먹다 남은 자잘한 치즈와 초콜릿이었다. (이때 비상식량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길을 가다 의자로 보이는 곳에 앉았다. 그리곤 계란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넉넉히 삶아두길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먹으려는 그때, 웬 떠돌이 큰 개 하나가 우리 앞을 어슬렁 거리더니 이내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아버렸다. 

떠돌이 개와 우리의 점심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어쩌지'     

 

정말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진짜 우리 먹을 것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그 개가 아예 눌러앉고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길래, 그냥 맛만 보라고 조금 계란 흰자를 떼어서 주었다. 생각보다 잘 먹어서 너무 놀랐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지만 덕분에 즐거운 점심을 보낼 수 있었다. 짧고 굵은 점심을 먹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길을 걸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표지판을 보니 팜플로나까지는 6.4km가 남았다고 했다. 

두 자리에서 한 자리로 줄어드는 숫자를 보니 더욱 힘이 났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팜플로나에 가면 호텔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옆엔 B언니, 내 손엔 구글맵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 도로가 나오더니 하나둘씩 차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얼마 가지 않아 PAMPLONA라고 대문자로 크게 적힌 흰색 표지판이 나타났다.  

 

"와-! 드디어 도착했다!!"


내 두 발로 전날보다 긴 거리를 걸었다는 뿌듯함이 밀려옴과 동시에 잠잠했던 내 배고픔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B언니도 같이 느끼고 있던 허기짐이었다. 그래서 우린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빵을 사 먹으러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문을 또 닫아버렸다. 내 생각엔 시에스타(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로 인해서 잠시 문을 닫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기엔 배가 너무 고팠고 아쉬웠다. 마치 발품을 팔듯이 우린 문 연 빵집을 찾아 빙빙 돌아다녔는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마트에 딸린 조그만 빵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테이블은 5개 남짓의 작은 공간으로 입구에서 왼쪽으로 길게 쭉 뻗어있는 구조였다. 거기에 할로윈 장식으로 데코를 해 놓은 모습이 좀 귀여웠다. 우리는 초코 나폴리타나 빵과 호박 모양의 초코 쿠키, 크로와상을 시켜 나눠먹었고 K언니와 사촌 언니가 기다리는 호텔로 다시 이동을 했다. 


다소 뜨거운 태양 아래 다시 일어나 움직이려니 꽤 힘들었지만, 최종 목적지는 언니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며, 또 호텔이니 힘을 안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은 지친 내 마음을 순식간에 녹여주었고, 잘 도착했냐는 언니들의 반가운 인사엔 미소가 절로 나왔다. 무사히 완주했다는 만족감이 상당히 컸던 순례 3일 차의 날이었다.    

  

날씨가 말해주는 이날의 팜플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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