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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Dec 14. 2022

순례 2일 차 : 널 위한 세레나데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21 금요일 Walking D+2 

론센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약 18km


얼레벌레 첫째 날이 지나고 순례 둘째 날이 되었다. 긴 밤 편히 묵었던 하얗고 깨끗한 알베르게에서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근처 바르(Bar)로 향했다. 바르 한 구석에 배낭을 툭 두고 우린 아침을 주문했다. 그때 시각은 오전 8시 50분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메뉴였지만,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다 맛있어 보였다. 작고 양 옆으로 긴 카운터 앞 쪽 유리 매대엔 크로와상, 뺑오쇼콜라 등 빵들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있고 순간, 그걸 먹을까 하다가 조금은 배가 안 찰 것 같아서 그냥 하몽이 든 보카디오(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와 꼴라까오(초코라떼)를 주문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주문했던 빵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 세상에!"


이것은 내가 생각한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거친 표면의 긴 바게트와 그 안에 올리브 오일을 쓱 발라 하몽만 덩그러니 넣고 흰 종이로 대충 둘둘만 모양이었다. 우선, 난 압도적인 크기에 너무 놀라서 이걸 어떻게 잘 먹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었다. (그 크고 대단한 모양을 가진 바게트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바게트를 먹기 전에, 몸도 녹일 겸 초코라떼부터 마셔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원래 한국이라면, 스팀우유에 초코 가루 혹은 초코시럽을 넣고 잘 녹인 후 완성된 것을 주지 않는가? 나 역시, 이렇게 생각을 하곤 초코라떼를 받았다. 허나 내가 받은 건, 따듯하게 데워진 스팀우유 한 컵과 ColaCao라고 써진 초코 분말 그리고 작은 나무 막대기가 다였다. 이 얘긴 즉, 알아서 타 먹고 저어 먹으라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날부터 초코라떼가 먹고 싶으면 "우나(1개) 꼴라까오(초코라떼) 뽀르빠보르(주세요/부탁합니다)."라고 주문하곤 했다. 순례 2일 차만에 원하는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나였다.

보카디오가 어찌나 큰지 결국 하나를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반 정도 먹고 남은 반절은 흰 종이로 잘 싸서 배낭 옆 주머니에 쿡 하고 쑤셔 넣었다. (나중에 배고플 때 먹을 비상식량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음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아침을 끝내고 언니들과 함께 다음 목적지인 수비리(Zubiri)로 출발했다.

딱봐도 커보이는 보카디오

모든 길이 험난하고 순탄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수비리를 향하여 걷는 이 길만큼은 모두 같이 걸어서 그럴까? 첫날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또한 어제 푹 쉰 것도 한몫을 했을 수도..?) 꽤 상쾌하고 들뜬 기분으로 뚜벅뚜벅 길을 걸어 나갔다. 녹음으로 가득한 주변 풍경과 그 공간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드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진짜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소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 그게 순례길이었다.


언니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걸었다. 그때쯤, 다음 마을에 24시 카페가 있다고 하여 그 마을까지는 쉬지 않고 가기로 했다. 나는 걷는 게 조금 힘에 부쳐도 카페 생각을 하며 걸어 나갔다. 마을 초입에 다다르니 그곳은 빨간 꽃들과 붉은 지붕들로 유럽의 느낌을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왔다면, 그 24시 카페에 근접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카페가 아니라 자판기였었다. 

난 자판기를 보자마자 그만 힘이 빠져버렸고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갖기도 했다. 24시간 동안 음료를 뽑아먹을 수 있고(?), 그 앞엔 포차에서 볼법한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쉬었다 가자고 했고, 다들 동의했다. 마침 딱 4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고, 우린 하나둘씩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앉기 시작했다. 난 24시 카페에서 환타를 뽑아 시원하게 목을 축인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짧은 휴식 이후 또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갈길이 많이 남아서 꽤 큰일이었다. 

바람과 함께 비가 후두둑 내리니 조금 당황했지만, 모두 다 같이 준비해 온 우비가 있었기에 얼른 홀라당 뒤집어쓰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앞을 향해 전진했다.


나에게 배고픔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바르가 없어서 적잖이 당황을 했던 터라, 일단 문을 연 바르가 있다면 바로 달려갈 기세였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도로 옆 쪽에 바르가 하나 있었다. 또한 손님들도 제법 있는걸 보아 문을 연 건 틀림없었으며, 맛집인 게 분명했다. 나는 밖에서 우비를 벗으며 마지막으로 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바르에서 나오는 4~50대로 보이는 한 외국인 순례자와 마주쳤다.


"날씨 어때요? 아직도 비가 오나요?"


"네, 비가 오네요..ㅎㅎ"


처음으로 외국인 순례자와 얘기를 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따듯한 말투로 사근 하게 나에게 물었고, 나는 모자란 영어실력이 순간 부끄러워 짧게만 대답을 하고 그녀의 안녕을 빌며 바르로 들어왔다. 밖에는 비가 와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반면 안에는 히터를 튼 마냥 온기가 가득해서 들어오자마자 포근함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후, 허기를 채울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를 쓱- 보는데 못 보던 음식이 있었다.


그것은 노란색 치즈케이크 모양의 또르띠야였다. (멀리서 봤을 땐, 크레이프 케이크 같기도 한..)

작지만 따듯했던 바르

난 몹시 배가 고파서 꼴라까오 하나와 또르띠야 하나를 주문했고, 몸을 녹이며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두툼하고 제법 큰 또르띠야가 포크와 함께 무심히 나왔고 한 입 먹었을 땐, 포슬포슬한 감자와 계란의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첫 유럽에서 처음 먹어본 또르띠야는 너무나 맛있었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잘 쉬고 화장실도 갔다 온 다음에 다 같이 출발을 했다. 숲길을 지나, 약간의 언덕을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꽤 많이 올라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이제 잘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다행히 내려갈 땐, 비가 오지 않았다) 점점 내려갈수록 길이 험했다. 어떻게 내려가라는 거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길의 상태가 심각했고 염병이었다. (그때 내가 스틱을 안 가져간 것을 처음 후회했던 것 같았다)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내려갈 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잘못하다간 넘어져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난 산티아고 예행연습을 하면서 발목을 다친 적이 있기에 내려갈 때는 정말 조심하고도 천천히 내려갔다. 


내내 아래로 향하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였다. 바로 우리가 갈 수비리(Zubiri) 마을이었다. 계속 걸어가도 마을이 안 보여서 지쳐있었는데 멀리 서라도 살짝 보이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비수기라 그런가? 순례길을 걷는 동안 순례자들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마을이나 사람들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곤 했었다. 마을이 육안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래도 거의 다 왔다는 뜻이므로, 더 힘내서 내려갔다. 어쩌다 보니 어제처럼 나눠지게 된 선발대와 후발대의 우리들이었지만, 숙소만큼은 다 같이 들어갔다.   

 나, 수비리(Zubiri) 마을 그리고 염병할 내리막길

내리막 길의 끝과 알베르게는 가까웠다. 바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 쎄요(도장)를 받으며, 방 안내를 받았다. 4인실에 2층 침대 2개가 나란히 있었다. 어제 잘 쉰 덕일까? 난 컨디션이 괜찮았고 다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 다만, 어제 피레네를 넘어온 언니 중 한 명이 많이 힘들어했었다. 몹시 지쳐있는 그녀를 보니, 어제 산을 넘은 것도 있거니와, 그때의 긴장이 풀려서 피로도가 꽤 쌓인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힘을 주고 싶었다) 실질적으로 그녀를 도울 방법이 따로 없을까 생각한 끝에 우리는 한식을 해 먹기로 했고, 근처 마트에 가서 닭볶음탕에 쓰일 재료를 사 와 요리를 했다. (난 재료 손질 담당이었다.. 하하!) 


잘 조리된 닭볶음탕과 와인 그리고 냄비밥. 우리는 공용 거실로 가서 서로 고생했다며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깊은 저녁 식사를 했다. 아직 순례 이틀 차의 새내기 순례자이지만, 꽤나 느낀 것이 서로서로 많았다. 밥을 먹으며 자신의 생각들,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고 싶었던 목표들 등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고 그 얘기는 우리 옆 테이블의 순례자 분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저녁 준비 그리고 첫 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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