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얼레벌레 첫째 날이 지나고 순례 둘째 날이 되었다. 긴 밤 편히 묵었던 하얗고 깨끗한 알베르게에서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근처 바르(Bar)로 향했다. 바르 한 구석에 배낭을 툭 두고 우린 아침을 주문했다. 그때 시각은 오전 8시 50분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메뉴였지만,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다 맛있어 보였다. 작고 양 옆으로 긴 카운터 앞 쪽 유리 매대엔 크로와상, 뺑오쇼콜라 등 빵들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있고 순간, 그걸 먹을까 하다가 조금은 배가 안 찰 것 같아서 그냥 하몽이 든 보카디오(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와 꼴라까오(초코라떼)를 주문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주문했던 빵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 세상에!"
이것은 내가 생각한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거친 표면의 긴 바게트와 그 안에 올리브 오일을 쓱 발라 하몽만 덩그러니 넣고 흰 종이로 대충 둘둘만 모양이었다. 우선, 난 압도적인 크기에 너무 놀라서 이걸 어떻게 잘 먹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었다. (그 크고 대단한 모양을 가진 바게트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바게트를 먹기 전에, 몸도 녹일 겸 초코라떼부터 마셔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원래 한국이라면, 스팀우유에 초코 가루 혹은 초코시럽을 넣고 잘 녹인 후 완성된 것을 주지 않는가? 나 역시, 이렇게 생각을 하곤 초코라떼를 받았다. 허나 내가 받은 건, 따듯하게 데워진 스팀우유 한 컵과 ColaCao라고 써진 초코 분말 그리고 작은 나무 막대기가 다였다. 이 얘긴 즉, 알아서 타 먹고 저어 먹으라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날부터 초코라떼가 먹고 싶으면 "우나(1개) 꼴라까오(초코라떼) 뽀르빠보르(주세요/부탁합니다)."라고 주문하곤 했다. 순례 2일 차만에 원하는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나였다.
보카디오가 어찌나 큰지 결국 하나를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반 정도 먹고 남은 반절은 흰 종이로 잘 싸서 배낭 옆 주머니에 쿡 하고 쑤셔 넣었다. (나중에 배고플 때 먹을 비상식량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음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아침을 끝내고 언니들과 함께 다음 목적지인 수비리(Zubiri)로 출발했다.
모든 길이 험난하고 순탄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수비리를 향하여 걷는 이 길만큼은 모두 같이 걸어서 그럴까? 첫날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또한 어제 푹 쉰 것도 한몫을 했을 수도..?) 꽤 상쾌하고 들뜬 기분으로 뚜벅뚜벅 길을 걸어 나갔다. 녹음으로 가득한 주변 풍경과 그 공간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드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진짜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걸었다. 그때쯤, 다음 마을에 24시 카페가 있다고 하여 그 마을까지는 쉬지 않고 가기로 했다. 나는 걷는 게 조금 힘에 부쳐도 카페 생각을 하며 걸어 나갔다. 마을 초입에 다다르니 그곳은 빨간 꽃들과 붉은 지붕들로 유럽의 느낌을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왔다면, 그 24시 카페에 근접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카페가 아니라 자판기였었다.
난 자판기를 보자마자 그만 힘이 빠져버렸고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갖기도 했다. 24시간 동안 음료를 뽑아먹을 수 있고(?), 그 앞엔 포차에서 볼법한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쉬었다 가자고 했고, 다들 동의했다. 마침 딱 4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고, 우린 하나둘씩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앉기 시작했다. 난 24시 카페에서 환타를 뽑아 시원하게 목을 축인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짧은 휴식 이후 또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갈길이 많이 남아서 꽤 큰일이었다.
바람과 함께 비가 후두둑 내리니 조금 당황했지만, 모두 다 같이 준비해 온 우비가 있었기에 얼른 홀라당 뒤집어쓰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앞을 향해 전진했다.
나에게 배고픔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바르가 없어서 적잖이 당황을 했던 터라, 일단 문을 연 바르가 있다면 바로 달려갈 기세였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도로 옆 쪽에 바르가 하나 있었다. 또한 손님들도 제법 있는걸 보아 문을 연 건 틀림없었으며, 맛집인 게 분명했다. 나는 밖에서 우비를 벗으며 마지막으로 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바르에서 나오는 4~50대로 보이는 한 외국인 순례자와 마주쳤다.
"날씨 어때요? 아직도 비가 오나요?"
"네, 비가 오네요..ㅎㅎ"
처음으로 외국인 순례자와 얘기를 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따듯한 말투로 사근 하게 나에게 물었고, 나는 모자란 영어실력이 순간 부끄러워 짧게만 대답을 하고 그녀의 안녕을 빌며 바르로 들어왔다. 밖에는 비가 와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반면 안에는 히터를 튼 마냥 온기가 가득해서 들어오자마자 포근함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후, 허기를 채울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를 쓱- 보는데 못 보던 음식이 있었다.
그것은 노란색 치즈케이크 모양의 또르띠야였다. (멀리서 봤을 땐, 크레이프 케이크 같기도 한..)
난 몹시 배가 고파서 꼴라까오 하나와 또르띠야 하나를 주문했고, 몸을 녹이며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두툼하고 제법 큰 또르띠야가 포크와 함께 무심히 나왔고 한 입 먹었을 땐, 포슬포슬한 감자와 계란의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첫 유럽에서 처음 먹어본 또르띠야는 너무나 맛있었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잘 쉬고 화장실도 갔다 온 다음에 다 같이 출발을 했다. 숲길을 지나, 약간의 언덕을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꽤 많이 올라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이제 잘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다행히 내려갈 땐, 비가 오지 않았다) 점점 내려갈수록 길이 험했다. 어떻게 내려가라는 거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길의 상태가 심각했고 염병이었다. (그때 내가 스틱을 안 가져간 것을 처음 후회했던 것 같았다)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내려갈 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잘못하다간 넘어져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난 산티아고 예행연습을 하면서 발목을 다친 적이 있기에 내려갈 때는 정말 조심하고도 천천히 내려갔다.
내내 아래로 향하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였다. 바로 우리가 갈 수비리(Zubiri) 마을이었다. 계속 걸어가도 마을이 안 보여서 지쳐있었는데 멀리 서라도 살짝 보이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비수기라 그런가? 순례길을 걷는 동안 순례자들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마을이나 사람들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곤 했었다. 마을이 육안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래도 거의 다 왔다는 뜻이므로, 더 힘내서 내려갔다. 어쩌다 보니 어제처럼 나눠지게 된 선발대와 후발대의 우리들이었지만, 숙소만큼은 다 같이 들어갔다.
내리막 길의 끝과 알베르게는 가까웠다. 바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 쎄요(도장)를 받으며, 방 안내를 받았다. 4인실에 2층 침대 2개가 나란히 있었다. 어제 잘 쉰 덕일까? 난 컨디션이 괜찮았고 다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 다만, 어제 피레네를 넘어온 언니 중 한 명이 많이 힘들어했었다. 몹시 지쳐있는 그녀를 보니, 어제 산을 넘은 것도 있거니와, 그때의 긴장이 풀려서 피로도가 꽤 쌓인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힘을 주고 싶었다) 실질적으로 그녀를 도울 방법이 따로 없을까 생각한 끝에 우리는 한식을 해 먹기로 했고, 근처 마트에 가서 닭볶음탕에 쓰일 재료를 사 와 요리를 했다. (난 재료 손질 담당이었다.. 하하!)
잘 조리된 닭볶음탕과 와인 그리고 냄비밥. 우리는 공용 거실로 가서 서로 고생했다며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깊은 저녁 식사를 했다. 아직 순례 이틀 차의 새내기 순례자이지만, 꽤나 느낀 것이 서로서로 많았다. 밥을 먹으며 자신의 생각들,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고 싶었던 목표들 등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고 그 얘기는 우리 옆 테이블의 순례자 분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