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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경화 Apr 13. 2017

도망쳐 온 날 오롯이 받아준 그 집은 희망.

태국 치앙마이 5개월간 치앙마이 살아보기 완료.

우리 빌리지 안의 풍경 _ 치앙마이 kankanok2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이라 믿었던

인생의 대소사가 이토록 비극적이고 비참한 사기 결말.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이런 일이 감히 일어날 거라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니....

얕은 술수로 내 투명한 마음을 더럽히다니.....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그동안 아득바득 챙겨 오고 거침없이 달려온

나의 커리어에 대한 크나큰 스크래치.

내게 남은 것은 바닥에 내팽개친 자존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세상의 시선과 두려움.





나는 도망쳤다.




당신에게 한줄기 희망 같은 딸년의 손을 붙잡고

계신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지라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태국 치앙마이로 우선 나는 떠나왔다.




익숙한 듯 어색한 치앙마이의 공기.

공기 위로 느껴지는 천연 색색의 하늘은

상처와 아픔으로 뒤덮인 내게

따스히 웃으며 어루만져 주었다.




치앙마이의 11월은

천국의 날씨, 지상 최고의 낙원, 언제나 미소 짓게

만드는 에너지를 준다.

(나는 16년 11월부터 17년 4월까지 6개월을 살았다.)






한국에서 내가 살던 집은

온종일 전국 방방곡곡 뛰어다니며 강의에 업무로

사람들을 종일 만나 지치고 또 지쳐버린

내 육신을 겨우 눕히고

맥주 한 캔 따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믿어버린

초라한 곳이었다.




대중 앞에 서다 보니 나름의 멋들어짐도 있고

완전체로 무장한 모습으로 늘 앞에 서다 보니

결점 없는 사람처럼 보일뿐,

나는 실상 매우 평범하고 부족함을

매사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집은 그런 나의 이중성을 매몰차게 알아주지 않는 곳이었다.

늘 날 조급하게 만들고 무언가를 하게 만들어

내일의 일정에 부담감에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하게 하는 불편한 곳이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사기 인지도 모를 흐린 판단력을

가지게 만들 정도로

내 삶의 안식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이 나의 집이라도 가차 없다.

쫓기던 사는 삶은

결국 쫓기는 선택을 하게 하고

결정을 하게 만든다.



나에게 애초에 집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 맞다.

나는 노숙자나 다름없다.




그런 내게 치앙마이 집은 고맙고 신기하게도

내가 겪은 어두운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어주었다.

세상과 끊임없이 부딪혀 이겨내라고 부축이던

한국에서의 집과는 비교 자체가 안된다.




치앙마이 집은 고요하다.

나를 시끄럽게 하는 건

단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울어대는 다양한 새소리일 뿐이다.





나는 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걱정했다. 고민했다. 생각했다.

내 아픔도 보인다. 내게 숨어있던 미소도 찾아냈다.

고요롭고 평화로운 내 집은 나를 무척이나

집중하게 만들어줬다.

자문자답을 하게 만들어 나는 나를 찾아보게 만들고 자꾸 나와 마주하게 만들어줬다.

나는 비로소 나를 안았다.

치앙마이 집이 나를 조건 없이 안아줬듯

나도 나를 안아줬다.




앞집에 사는 캐나다에서 오신 존슨 아저씨와

매일 인사를 나눈다.

옆집에 사는 시끄럽지만 다복한 아이 부자

중국 가족들과도 산책길에 미소를 주고받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모임과

하루에도 몇십 장의 명함과 악수를 주고받은 사람들

정말 단 한 명도 기억나지 않는다.

길고 난다는 그들 돌아서면 사실 기억도 안 난다.

그들에게도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라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이 났다.



존슨 아저씨와 중국 가족들보다 훨씬 내게 중요한

만남이라 하지 않았었던가...

필요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억이 없다.




집이 내게 주는 의미가 크다 보니

집 주변에 모든 것들도 내게 의미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상상도 못 할 썬배드가 있는

아름다운 수영장.

빌리지 안에 있는 지극히 동남아스러운 수영장





산책길이 쭉 뻗어있는 로드는 사실 걷고 싶기보단

그냥 바라보게 만든다.

사람 한 명 없는 평화로움을 언제 느껴보았던가.

한국에는 퇴근시간

여섯 시 이후 모두가 죽기 살기로 나와

동네에 있는 인공천과

피트니스에 개미 때같이 몰려들어 보고 받은 일을

처리하듯 숙제하듯 운동하지만

이곳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걷듯 뛰듯 슬로 시티, 슬로 라이프다.

이곳은 치앙마이다.




강렬한 햇살이 창가에 비치면 몸을 저절로 앉히게 만들지



한국에서 옷가지만 덜렁 가지고 왔기에

치앙마이 집에는 없는 것 투성이다.

그런데 살아진다.

아주 잘 살아진다.

한국에서는 일단 사고 또 사고 그리고 집에

곡식창고에 저장하듯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럼에도 부족함을 느껴 쇼핑을 나간다.

마트에서 카트에 가득 싣고 주말에는

백화점을 간다.



치앙마이 집은 있는 게 없다.

없는 게 많다.

그렇다 하여 부족한 것도 전혀 없다.

되려 충만하다.




치앙마이 집의 내 방에는

침대와 이불이 전부다.



한국에서는 침대 옆 어질러놓은 책들과

서류, 흘겨놓은 메모지와 펜....

보조충전기 두 개를 꼽아놓고 미쳐 꺼버리지 못한

스탠드 불 밑에 겨우 엎드려 누워있기

다반사다.




매일같이 꿀잠을 자고

이렇게 잘 자도 되나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게

미안함도 느껴봤다.





아 집은 이런 거지?

아 내 공간은 이런 곳이지??



집이 주는 감사함,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주는

내 삶의 영향력, 나의 정신상태에 긍정적 에너지.

그런 것들을 고스란히 느껴질 즈음

치앙마이 살아보기도 끝났다.




도망치듯

나왔던 이곳,

관심도 없었던 이곳이

내게 준 인생의 다이아몬드 같은 고귀한 가치를

과히 누가 알 수 있을까?



집은 그런 곳이다.

상처에 짓눌린 나를 고스란히 안아주는 곳.

슬픔에 둘러싸여 고통받는 나를 토닥여주는 곳.

이유 없이 굿모닝, 굿밤을 해도 불편하지 않는 곳.

집은 그리고 그 공간은

어느새 나를 닮아있다.

본연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집은 온전히 송경화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내가 집을 닮은 것인가? 집을 내가 닮은 것인가?





이제 난 도망쳐 나온 그곳

한국 집으로 다시 가게 된다.

집이 나를 닮을지 나를 닮게 만들 수 있는 집이

될지는 오직 내게 달려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고

지금의 나, 앞으로의 나도 사랑할 마음을 먹었다.

상처와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준 치앙마이 집에서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성숙하게 그리고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달리 먹게끔 도와주어

본래의 씩씩하고 건강한 나로 돌아왔다.



.

.

.

.







나는 이제 나의 집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

그곳이 어디든......








ㅡㅡㅡㅡㅡㅡㅡ치앙마이 집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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