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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Jan 26. 2018

고마워 정현, 꿈을 이뤄줘서

상상도 못한 일이 벌써 이루어지다니

내가 호주유학을 시작한 게 2010년 1월 24일이었다. 딱 8년 전 이맘 때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오히려 별 대비 없이 가는 게 좋다는 유학원의 조언에 따라 진짜 몸만 떠나고 말았다. 아무 대비 없이 들어간 홈스테이, 부모님은 홈스테이와 가족처럼 지내라고 조언하셨고 나는 그 말을 철저히 따랐다.


홈스테이 가족은 매일 밤 테니스를 틀어놓고 조용히 관전하길 즐겼다. 마치 진짜 경기장에 있는 관중처럼, 랠리 때는 숨을 죽이다가도 점수가 나면 훌륭했다느니 평가를 하며 경기의 일부가 되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접한 호주오픈이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언제나 숨 죽이게 만드는 형광색 공의 향연은 나를 테니스의 길로 인도했다.


내일이면 정현이 당당히 호주의 저녁을 장식하게 된다. 출처 연합뉴스

언론은 온통 테니스 얘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녁시간만 되면 채널7을 틀어 테니스를 관전했다. 학교에는 테니스 코트가 하나씩 있었으며, 친구들은 학교에서 전날 경기 이야기를 했다. 그야말로 테니스가 생활의 일부. 내가 호주에서 테니스의 위상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호주오픈에서 '메인 저녁 경기'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온 가족이 하루 일과를 끝 마치고, 저녁을 함께한 뒤 TV 앞에 모여앉는 시간. 그 시간대는 언제나 최고 인기선수의 몫이었다. '빅3'로 불리는 페더러와 나달, 조코비치의 경기가 항상 앞서있었고 유일한 예외조차 자국민인 호주 선수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메인 저녁'을 스포트라이트의 척도로 삼았다. 프라임 타임은 관심도 자체가 다르니까. 말 그대로 모든 호주인의 시선을 받으며 경기를 치를 수 있으니까. 언젠가 한국인이 저 자리에 있는 날이 올까? 나는 8년 간 상상했다.


정현과 조코비치의 16강 맞대결은, '메인 저녁' 시간대를 배정 받으며 상상을 처음으로 실현 시켰다. 압도적인 관심 속에서, 정현이 멀리서 지켜보는 세계인들을 실망 시키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현이 이겨버렸다. 3:0 셧아웃. 정현은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자신의 테니스를 2300만 호주인들에게 널리 알려버렸다.


조코비치를 꺾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메인 저녁 시간이 상상이었다면, 4강은 꿈과 같았다. 4강부터는 낮 경기가 없다. 단식은 (남녀가 겹치지 않는다면) 하루 한 경기만 펼쳐지고, 시간은 자연스레 메인 저녁이 된다. 이 때부터는 모든 경기가 온 호주인의 관심을 받으며 전파를 타기에, 모든 상황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매년 1월만 되면 호주오픈에 취했다. 한국에 있으나 호주에 있으나, 매일 저녁만큼은 테니스를 틀어놓고 살았다. 옛날부터 꾸었던 꿈이, 약관의 한국 테니스 선수가 벼락처럼 나타나 조코비치와 다섯 시간의 4강전을 벌이고 결승전에 진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천재가 나타난다면 좋을 텐데, 나는 그런 달콤한 꿈을 꾸면서 쓸데없는 디테일을 만들곤 했다. 생각해 보니 호주오픈 4강이면, 한국에서도 무조건 공중파를 타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한국인 선수'의 경기가, 양국 공중파로 전파 되며 널리 알려지는 꿈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한국에는 테니스 열풍을, 호주에는 한국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놀랍게도 2018년 현실이 되었다.


약관이 막 넘은 한국 테니스 선수는 벼락처럼 나타나 태풍을 몰고 왔다. 32강에서 세계 4위 즈베레프를 꺾고, 16강에서 호주오픈의 최강자 조코비치를 꺾었다. 1, 2회전을 "많이 컸네"하며 흐뭇하게만 바라보던 나 또한, 시간이 지날 수록 경탄을 마지 않으며 정현의 승리와 함께했다. 즈베레프 때는 포효했고 조코비치 때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이 말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점잖다는 테니스를 보며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정현은 꿈에서나 이루던 조코비치 격파를 현실로 만들어 진짜 4강까지 다다랐다. 내 예상대로, 호주오픈 4강은 중계채널을 JTBC 메인으로 옮겨버렸고, 올림픽을 앞둔 한국에 때 아닌 테니스 열풍을 몰고 왔다. 정현의 성취가 마치 내 꿈을 이룬 것처럼 흐뭇한 이유다. 정현은 순식간에 성장했다. 그는 이제 희망이 아닌 자존심이다.


현실이 된 4강의 진짜 상대는 페더러다. 기실 내 꿈은 다섯 시간의 혈투를 펼친 뒤 결승전에서 패배하는 내용이었다만, 이미 꿈이 이뤄진 마당에 더한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상상만 했던 '메인 저녁' 시간 경기가 이뤄졌고, 꿈만 꾸던 '4강행' 또한 이번에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제 꿈도 못 꾸던 '우승'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간 어떤 스포츠를 보면서도, 국가의 자랑 같은 말을 피해가며 애국심과 멀어지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현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대회에 쏟아지는 관심을 체감하고, 여기까지 다다르기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인 지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테니스에 입문하던 2010년, 나는 페더러와 머레이의 결승전을 보며 안 되는 영어로 내 긴장감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오늘 밤, 심장이 터질 듯한 정현의 경기를 기대해 본다.


1월 26일, 오늘은 'Australia Day'로 불리는 공휴일이다. 호주를 뒤집기 위한 판이 깔렸다.

고맙다, 현아. 만화 같던 꿈을 현실만들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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