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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장 May 07. 2020

책도 보는 바보

누군가에게 추천받은 책이란 그와의 인연의 증표와도 같아서 어느 부분에서 그가 좋아했을지 왜 좋아했을지 읽는 내내 곱씹게 된다. 이 책이 너에게 가닿기를 진심 어린 말로 전해주는 그를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어느새 나도 누군가에게 이 책을 전하고 있었다. 좋은 책은 이렇게 흘러 흘러 오래도록 살아가나 보다.     


간서치 (看書癡)

[명사] 지나치게 책을 읽는 데만 열중하거나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 같기도 하고 영어 같기도 하고 입에 쫙쫙 붙는 단어이다.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看書癡)’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p22  

   

이덕무. 참 매력적인 사람. 책만 읽는 그를 위해 곁에서 밤새 바느질해주고 싶은 맘이 간절히 생기는 그런 사람. 맑디맑아 그의 곁에 있으면 나도 정화될 것 같은 느낌. 그와 함께 읽고 밤새 이야기하고 싶고 그의 가르침도 받고 싶다. 평생 2만여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그는 서자 출신이지만 관직도 맡았고 글도 잘 써 중국 시단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한다. 그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책은 1700년대 사람인 그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는 정말 윤회의 중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서자의 신분이라는 우리의 운명, 세운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가슴에 품고만 살아가야 하는 이 삶도 윤회의 한 부분일까. 우리에게도 저 꽃처럼 다시 돌아갈 제자리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견뎌 내리라,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벌통에서 밀랍으로 묵묵히 견뎌야 하는 고통, 말간 액체가 될 때까지 활활 타는 불길에 온몸을 녹여야 하는 고통도 기꺼이 견뎌 내리라. 우리들의 삶도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p59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정을 나누고 함께 읽고, 웃고 울고. 참 우리네 삶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보내기보다는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했던 그들. 옛날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신선한 사고의 사람들. 부럽다 그와 그가 품은 사람들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제사 지내는 것이 좋았다. 지글지글 전 부치는 소리 오랜만에 만나 쉼 없이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들, 할머니와 단둘이 있던 집에 온통 시끌벅적한 소리들로 가득 차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나도 그분들을 알았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고 때로는 보고 싶기도 하여 오래된 사진첩을 뒤져 보았다. 그래서인지 시집와서도 일 년 여덟 번의 제사가 싫지 않았고 항상 그분들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음식을 하고 찾아오시는 어른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저 세상 계신 시어머니가 항상 나의 등을 토닥여 주는 것 같고, 많은 것 배워보고 싶은 내가 망설여질 때 어린 나이 먼저 간 삼촌이 내 몫까지 어서 해보라고 용기를 주는 것 같다.

     

한 권의 책을 넘어 이덕무와 그의 벗들도 나에게 다가와 알 수 없는 나의 길에 손때 묻은 지도 한 장 펼쳐 주는 것 같다. 그들처럼 항상 갈고닦으며 정진하면 언젠가는 잘 맞게 쓰일 것이라는 믿음. 아이들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나다운 나로, 누군가의 진정한 벗으로 그렇게 잘 쓰이고 싶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책만 보기엔 내가 쓰일 곳이 너무나 많기에 책도 보는 바보로 오래오래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평생에 한 번만 보아도 인연이 있다 하는데

하루 걸러 자주 만나니 굳은 정을 알겠네.

가을처럼 느껴지는 사람, 또 누가 있겠는가?

그의 마음 알려거든 눈썹 먼저 살펴보라.     

이덕무 p68

<2015년 MBC 수목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

패러디. Sun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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