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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 Nov 17. 2019

오드 아이 섬

배달의 마녀 기행시- (5) 시그널 달팽이


어제 먹으려고 벗겨 둔 내 바나나가 분명 움직였다.

잘 봐. 컵에 바로 붙어 있었는데 2센티나 떨어졌잖아.

잘 봐. 2센티나 떨어졌는데 지금 3센티는 되어 보이지?


3센티가 한 뼘쯤은 되어 보일 때까지

나는 분명 잠이 들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갈변한 바나나는 먹다 만 사발면 뚜껑 위에 있고

테이블 다리를 붙잡고 딥키스를 하고 있는 민달팽이 한 마리가 생뚱맞게.  


쪼리에 발을 꾸깃 끼고 나와

해변에 퉁퉁 부은 눈의 꼽을 털다  

손가락으로 높은 음자리표 하나를 모래에 눕혀 그린다.

이게 내가 아는 달팽이..
멍하니 내려보고 있는데 파도 길게 밀려와 높음 음자리표의 꼬리만 남기고 싹 지워버린다.

나는 쪼그려 앉아 해변 모래에 박힌 조개껍질들을

주워 든다.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매끈하고 동그랗게 생긴

빈 고둥 껍질 세 개를 바닷물에 헹궜다 들고 와 민달팽이 몸에 이리저리 대본다.


오. 나는 패턴사 같아. (이왕이면 디자이너라고 쓸까.)
오. 나는 부동산 사장님 같아. (기왕이면 건설업자라고 쓸까.)


요 살짝 노르스름한 고둥 껍질이 네게 딱이다!

휘파람을 부는데  갑자기 고둥 안에서 스파이더 맨처럼 튀어나온 소라게가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다짜고짜 손가락을 쳐들고 따지고 드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 데려다 드릴게요.


그날 밤, 화장실을 가려고 눈을 떠보니

아침의 그 민달팽이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본다.
이건 분명 다시 잠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우아라니.

"짊어지는 것이 뭐가 좋은데?"
달팽이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묻는다.

"우아..... 아니.. 그 "
달팽이 머리 위에 있는 가위가 달빛에 반짝인다.

그래 가위! 지금 가위에 눌린 거지.


" 말해봐."
달팽이가 살짝 몸을 튼다. 아.. 저건 가위가 아니고 더듬이였구나.

"어.... 나는 네가 너무 느린데 다른 달팽이들처럼 집도 없고 숨을 곳도 없는 게 불쌍해서..."
달팽이가 내 얘기를 듣고 픽 웃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느린 게 아니라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타이밍을 찾는 중이지.
 우주에서는 내가 얼마나 빠른데"

"우주? 네가 빠르다? "
잠이 깬 눈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들은 우주의 여러 행성을 오가며 시그널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해.
빛나는 더듬이가 송수신 역할을 한다고. 너무 빨리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 끈끈한 몸에 종종 우주를 떠다니는 부유물이 붙거든.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운석 조각을 만날 때가 있어.
그게 몸에 붙어서 같이 이 행성으로 떨어진 거야.
너희들은 그 어마어마한 확률을 보고 있는 거지."
 
달팽이가 불편한지 자세를 바꾸려다 엉덩이 한쪽을

의자에서 떼어내는데 애를 먹어가며 말을 잇는다.

"여기서는 운석. 유성. 별똥별.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고. "

데이터를 수집하는 달팽이답게 왼쪽 더듬이를 돋보기처럼 돌려 댄다.
수천 년 전 이곳에 떨어졌던 커다란 운석부터 작은 운석까지의 정보를 끝없이 쏟아낸다.  

"그럼 속도를 늦추면 되잖아"

"아니, 우주에 새로운 것은 넘쳐나는데 어떻게 느릴 수가 있지? 정보 수집은 빠를수록 좋아."
단호하게 말을 받아치는 달팽이의 민 몸이 다시 오래된 바나나로 보인다.

"너와 같이 떨어진 어딨어?"

그가 제 등을 보려고 몸을 돌리자 뱃 살에 쫀득한 점액질이 실타래처럼 생겼다 끊어진다.


" 나뭇잎 위에 떼 버렸지. 이걸 억지로 떼내느라 투명했던 피부가 새까매졌어.

달팽이 집이라 불리는 나선형 운석 조각은 태엽시계 역할을 하거든.

각자가 이 행성에서 살아갈 시간만큼만 감겨 있다고.

암튼 난 이 삶을 순응하고 사는 저 달팽이들과 달라."


투덜대던 달팽이가 반대쪽 엉덩이를 떼다 시계를 힐끔 쳐다본다.
더듬이가 고장 난 온도계처럼 빨갛게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달팽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게 달빛에 비친다.


[ 배달의 마녀 :  오드 아이 섬 中 시그널 달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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