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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 Nov 17. 2019

오드 아이 섬

배달의 마녀 기행기 - (2) 향유고래  

6~70년대의 날짜가 적힌

누군가의 싸인들이 액자에 소중히 걸려 있는 민박집.

머리를 좌우로 뒤척일 때마다 나무 바닥이 끄윽 끄윽 관절 소리를 내고 눅눅한 침대 패드가 강렬한 세제 향을 콜록콜록 뿜어대는 3평짜리 공간에서 해변으로 나가 오늘의 배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본다.

왼손 커피잔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다가 순식간에 “쏴아~”하고 장대비로 퍼붓는다. 잠도 덜 깼는데 아침부터 이게 뭔 일인지. 한 손으로 눈꺼풀에 붙은 머리와 팬티에 붙은 바지를 떼어가며 목도리도마뱀처럼 겅중겅중 올라 뛴다.


참았던 비가 바다 수면을 폭격한다.

무작정 뛰다가 발견한 해변의 파란색 철 지붕 아래에 몸을 숨긴다. 속눈썹을 닦으며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쉰다. 지독한 돌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더 크게 숨을 마셔본다.

성냥 냄새, 사향 냄새가 묘하게 섞여 난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나는 커피 반 빗물 반으로 믹스된 액체를 흐르는 바닥에 홱 쏟고 물컹해진 종이컵을 구겨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 sperm whale!"

' 깜짝이야...'

백발의 난쟁이가 보트 안에서 승리에 도취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 파란색 철 지붕이 달린 컨테이너 박스 바로 앞에는 당장 고물상에 갖다 줘도 난감해할 녹이 장악한 작은 보트 한 척이 있다.

'바다에 뜨기나 할까...'

배의 옆 면에 '마린 블루 1호'라는 글자가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분명 향유고래야. 향유고래가 왔다고."

'에? 향유고래라고?'

장대비 속에서 배의 타륜을 잡고 앉아 있는 노인도. 과하게 아담한 그의 키도 정말 신기했지만.

향유고래? 'sperm' 정자 고래라니? 괴상한 이름의 고래가 왔다는 말에 거리를 좁혀 본다.

"저 고래는 바다와 우주를 오고 가는 유일한 배야 "

페스츄리 같은 그의 이마가 떨린다.

"우주요? 왜 바다에서 우주로 가요?"

"향유고래는 우주의 수송선이니까"

"수송선? 무언가를 나른다고요?"

화가 난 것이 아닌데 빗소리를 누르고 대화하느라 내 언성이 높다.

노인의 흰 눈썹과 흰 수염이 바람에 너풀거린다. 그의 두 손은 여전히 타륜을 잡고 있다.

" 고래가 우주로 나르는 게 뭐예요? "

잘 못 들었을까 봐 한 번 더 크게 물었다.

"고래가 우주로 나르는 거요."

그의 두툼한 콧방울이 심하게 펄렁인다.

내 눈동자도 그의 콧방울을 따라 움직인다.
다가 불어나는 것을 한참 지그시 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뗀다. 그의 어조가 좀 차분해졌다.


" 바다에는.. 바다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벗어 놓은 허물 옷이 있어."

" 허물 옷? 애벌레 번데기 껍데기 같은 허물요? "

" 심해에는 망상의 기슭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고.

 거기 걸려있는 옷들을 배에 담아 오는 거야.

 49일에 한 번씩."

"왜요?"

" 옷의 주인이 우주로 오면 찾아서 가져다주는 거지. 그게 향유고래의 천명이야.

옷의 숫자가 아마 77억 벌 이상은 될 거야. 찾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

"그럼 내 허물 옷도 갖고 온 거예요? "

내 질문이 신기한 듯 두 눈을 빤히 쳐다본다.

"아마 없는 것 같아. 지금 네가 못 알아보잖아.

고래가 바다에서 꺼내려는 순간 주인은 내 옷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무의식에 알아차리거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보트에서 나와 서쪽 해변을 향해 투벅투벅 걸어간다. 새하얀 백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게 마치 연기처럼 보인다. 나는 지붕 밖으로 손을 뻗어 가늘어진 빗줄기를 만지다가 저 멀리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손바닥 위에 원근감 있게 올려본다.

그의 키가 씨앗보다 더 작아질 때까지.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언제 향유고래를 만나게 될까?'

풋 웃음이 나면서도 노인의 분위기에 같이 도취되었는지 기분이 묘하다.

참았던 해가 비를 밀어낸다.

'그 허물 옷을 입을지 입지 않을지가 인간들이 생에 끝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야.'

노인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젖은 모래에 온점으로 길게 찍혔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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