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로 Nov 17. 2019

오드 아이 섬

배달의 마녀 기행기 - (10) 나를 찾아온 은빛 정어리

차가운 여름이 지나고

뜨거운 겨울이 지나고

계절의 태엽은 어디까지 감겨 있을까.  

바다 안에는 태엽에 감긴 사계의 실이 길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새롭다.


무한한 바다 안에서

산호가 일제히 산란을 하는 봄,

조의 물방울이 오고 가는 여름,

비늘 낙엽이 회오리치는 가을.

거북이의 유골들이 쌓여 있는 겨울 사원을 지나

다시 태엽의 실을 더듬어 봄을 바라본다.     


바닷속에서는 뜨는 힘, 가라앉는 힘이 공존한다.

위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양성 부력, 아래서 나를 끌어당기는 음성 부력.

뜨고 가라앉지 않으려면 두 힘이 같아지는 수평 저울의 중간점, 중성 부력을 찾아야 한다.

손가락 하나 추진하지 않아도 고요하게 뜰 수 있는

나는 금세 중성 부력을 찾았다.

아기 돌고래처럼 회전하며 놀다가

바다의 바닥에 누워 일렁이는 햇살이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양수에 다시 들어온 것처럼 포근하다.

 

그때 어디선가 엄청 난 크기의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유유히 다가와 내게 말을 건다.

" 우린 만난 적이 있어 "


" 나를 알아? "


" 당연하지, 그날 내가 네 심장을 얼마나 두드렸는데."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물고기 눈동자 속에 검은 사과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 그날?  "


" 응. 네가 갑자기 우리 가운데에 나타났고, 이 문 안으로 떨어졌잖아. 흠흠"


나는 기억을 찬찬히 더듬는다.

프리다이빙 중에 은빛 덩어리들이 허리케인처럼 바다를 밀고 왔을 때가 떠올랐다.

5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이는 물고기 떼는 크고 촘촘한 국화꽃의 꽃잎들이 일제히 뜯겼다가 다시 복원되는

신비로운 군무를 반복하며 실패의 실처럼 내 몸을 휘감았다.

물고기들은 요술을 부렸다.

나비 떼가 되어 방울 키스를 퍼붓다가

다시 은빛 칼이 되어 현란한 칼춤을 췄다.

이 거대하고 장엄한 광경에 심장이 세차게 버둥거렸다.

한껏 휘어진 칼날들이 내 숨 방울을 끝도 없이 베었다.

난 정확히 이들 가운데에 있었다.

바다 태풍의 눈 속에 있었다.


" 아... 정어리떼. 너는 정어리구나."


" 흠흠. 정어리? 촌스럽군. 뭐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어휴.. 드디어 찾았네."


물고기 눈동자 속에 검은 사과가 또 커졌다 작아진다.


" 나를 왜 찾은 거야?"


" 흠흠, 너는 우주의 문 앞에 걸려 있었어. 오우.. 정말 아찔했지. 내가 군무 중에 이탈해서 너를 빼내려다가 실수로  밀어뜨렸어. 흠흠.그건 정말 실수였다고. 흠흠.사죄할게.

너를 구하려다가 나는 죄를 지었고 죄책감에 여기까지 너를 찾아온 거야."


" 떨어지다니..내가? 다이빙중에 정어리떼를 보았고 그 다음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우주의 문? 우주의 문이 뭐야? "


" 바다에는 우주로 통하는 문이 흘러 다녀.

  하루 한 번 문이 열리는데 우리들은 그 문을 가리는 일을 해.근데 갑자기 네가 나타나서 이 문 안으로 떨어졌잖아. 흠흠"


" 우주의 문을 가린다...? 커튼처럼? "


" 흐흠. 이보게 커튼이라니. 그날 우리가 춘 춤을 보지 않았나? 흠흠!  

제1장 공간 왜곡 웨이브, 제2장 칼군무 협곡의 굴곡, 제3장 거울 아라베스크, 제4장 버블 버터플라이!

이 춤의 창시자가  33,437대의 내 할아버지거든. 오랜 전통의 군무를 뭘로 보는 거야. 흠흠! "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튀어나온 턱을 쓰다듬자 아래턱의 양 이빨이 반짝거린다.


"돌고래들이 휘슬을 불 면 바다거북이가

우주의 문 스위치를 켜지.컬러풀한 친구들이

바다에 들어온 인간들의 시선을 잡고서야 그 문이 열린다고. 흠흠. 우리들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그 문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거야."        


" 음.. 왜 가려? 그냥 그 문으로 나가면 안 돼? "

  

" 흠흠. 돌아오지 못하니까. 곧 태어날 것과 이미 죽은 것만 드나들 수 있지."


" 바다와 우주를 드나드는 향유고래를 알아"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꼬리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 향유고래에는 탈 수가 없어. 향유고래들은 나르기만 하거든. 그건 무아의 배야."


" 그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야?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


정어리 눈 안의 검은 사과가 촛불처럼 흔들린다.  

그는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더니 목을 흠흠 가다듬으며 말을 한다.


 " 오늘 밤이 바로 일 년에 단 한 번, 바다의 산호들이 동시에 산란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야.

수천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일제히 산란을 한다고.

산호의 정자와 난자가 바닷속에 쏟아질 때 우리도 같이 나가야 해!  흠흠. 지금이 아니면 넌 평생 돌아갈 수 없어.. "    


"돌아가? 나는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는데 어디로? "


' 돌아..간다?'

갑자기 수가지의 이미지가 비눗방울처럼

하나씩 떠올랐다.

나이 든 여자의 얼굴, 아기의 얼굴, 어떤 말소리, 사진,

물건, 웃음소리, 울음소리, 비명 소리...  

그 이미지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이름과 내용이 없는 이미지에 가슴이 덜컹거리고  

뜨겁게 터졌다 녹았다 아팠다 눈물 콧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각하고 있었.

그리고 무얼 망각했는지도 망각하고 있었다.


'뭘까..? 대체 왜 이런 걸까? '

 

정어리는 턱을 괴었던 지느러미를 풀어 내 등을 크게 쓰다듬으며 어서 서둘러 가자고 재촉한다.

나는 정어리의 등에 있는 가장 큰 지느러미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끄덕였다.



이전 09화 오드 아이 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