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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Jan 10. 2023

그러니까 살기를, 살아남기를.

아파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비바람이 부는 날들이 이어지다가도 어느 날 아침 말끔히 개고 나면 맑고 푸른 하늘, 태양이 주위를 가득 밝히는 그런 날도 만나게 된다. 삶도 반복된다.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 웃음 나는 날이 있다가도 너무 힘들고 괴로운 날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날들은 장마와 같이 느껴져서 내리는 비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젠가 멈추는 날이 온다.


내게도 특히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는 방 정리도 잘 못했고 술도 자주 마셨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항상 어떤 일이든 붙잡고 있었고 내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이 아픈 날도 있었고 회복되지 않을까 봐 크게 걱정하곤 했다. 몸이 아파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때면 초조하고 불안했다. 맘 편히 쉴 줄도 몰랐다.


힘든 시기기 지나가자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받고 내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갔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좋아졌다며 나를 보며 환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하루에도 정말 많은 일을 소화할 수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할 힘이 생겨서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 시기가 지나가자 또 마음의 겨울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덮쳐온 것은 비슷했지만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힘든 사건들을 핑계 삼아 예전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내면을 더욱 깊이 돌보게 되었다. 어릴 적 상처와 마주하고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


요가를 하고 오는 길에 한 청년이 전봇대를 붙잡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청년은 이내 스르륵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남학생 둘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지나쳤다. 청년을 지나쳐오는데 마음이 쓰였다. 술에 취하면 잠시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청년이 주저앉은 곳은 찻길 바로 옆이었다. 차가 청년 가까이 쌩하고 달려갔다. 자칫 옆으로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차와 청년은 서로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열 걸음 정도 앞서 걷다가 다시 돌아섰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 술 취한 아저씨가 차도 한복판에 대자로 누운 장면을 목격했다. 보자마자 바로 차도로 가서 오는 차를 막았다. 그러자 함께 목격한 사람들 3명이 와, 함께 아저씨를 인도로 들어 옮겼다.


"괜찮으세요?"

내 말에 아저씨는 대답했다.


"내가 00경찰공무원인데 오늘 짤렸어. 짤렸다고.."

아저씨는 화가 나 보였고 만취해 있었다. 경찰 업무를 하다가 뭔가 억울한 일로 퇴사를 당한 것 같았다. 주저앉아 우시는데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일 수도 있는 분인데 소중한 몸을 차도에 던질 정도로 힘든 일을 겪으셨구나..


"정말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집에 가셔야지요. 집에 가셔야지요."

아저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경찰이 왔다. 경찰은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경찰분들이 집까지 안전하게 가주시겠지..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운 공기, 차가웠던 코끝, 손발, 입김, 외로움 가득했던 마음이 떠오른다.


나도 힘들 때면 그렇게 술을 찾았다. 한창 술을 마실 때는 모든 이유가 술을 마실 핑계였던 적도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흐려서, 비가 와서, 기쁜 일이 있어서, 슬픈 일이 있어서, 아무 일도 아니라서,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서, 바람이 많이 불어서 등등.. 그 시기엔 그게 낙이었고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데 술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 더 즐거웠고 재밌었고 용기가 났다. 평소에 하지 못했던 표현도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름 날 숙취로 인해 어김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고 기분은 더 좋지 않았다. 실수라도 한 날은 비참한 기분과 자책감으로 괴로워했다.


명상을 하고 마음을 돌보고 억눌린 감정을 풀어주면서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이런 변화가 신기할 정도다. 더 이상 술에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한때 안 먹어보겠다고 금주를 자주 했는데 참았기 때문에 깨지고 나서 그만큼 더 먹기도 했다. 지금은 억지로 참는 것도 아닌데도 먹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긍정적인 변화로 생각하고 있다.


힘든 시기에는 뭐든 붙잡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게 건강한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기에 그 방법을 잘 몰라서 하는 행동들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다.


청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 바로 옆이 차도거든요. 안쪽으로 더 오셔야 해요. 차가 계속 지나다녀서 위험해요."


술에 잔뜩 취한 청년은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이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다니. 정말로 감사드리는데요.. 네 감사드려요. 하지만 저.. 보시는 것처럼 많이 취하진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잔뜩 취한 모습이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차도 옆이라 말씀드렸어요. 집에 조심히 가세요."


"네, 집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취하진 않았거든요."


갑자기 청년은 파워워킹을 하며 내 앞을 가로질러 갔다. 갈 지 자로 걷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딱 그 말대로였다.


청년은 정말 딱 갈 지 자로 걸어갔다. 넘어질까 봐 뒤에서 걱정하며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청년을 보며 걸었다. 청년은 이내 벤치에 앉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외국 팝송인 것 같았는데 나는 천천히 그 옆을 지나갔다.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청년이 집까지 조심히 가길...' 마음으로 바라며.


힘든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같다. 꼭 나로 인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세상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운 날들도 결국엔 지나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빚이 몇 천이 있었고 하는 일도 계속 실패해서 좌절감에 목숨을 그만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 그랬다가 운이 좋게 살았고 그 뒤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먹고 일을 하며 꾸역 꾸역 살았다. 세상 모든 불행을 짊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서. 그 와중에 애인이 생겨 다시 얼굴이 밝아지기도 했고 1년이 지나서는 권태기가 왔는지 애인과 멀어져 다시 술만 주야장천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 없고 아무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지독히 외롭고 고독한 사람. 몇 년이 흘렀고 계속 살았다.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면서. 지금은 표정도 편안해졌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다시 만나는 사람도 생긴 것 같다.


중국 영화 '인생'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오래전에 본 영화라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영화를 보고 정말 말 그대로 인생을 배웠다.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그 사람은 그 일을 모두 겪는다. 온몸으로 겪어낸다. 그러고도 살아간다. 모진 풍파,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다. 한 생에 모든 것이 있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다.


지금 너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꼭 지나갈 거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도 위로가 안되고 믿기 어렵겠지만. 내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며 배워가면서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아픔들을 지나 보낸다. 과거가 된 경험들은 지금의 내게 힘을 준다. 물론 매번 찾아오는 경험이 조금씩 다르고 새롭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긴 매한가지지만 그럼에도 맷집이 생겼다고 할까. 세상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조차 나만큼은 나를 믿어준다. 그러니까 살기를, 살아남기를. 아파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오늘도 내일도. 매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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