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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Dec 26. 2020

내면아이

 얼마 전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났다. 가이드가 들려주는 명상을 하기 위해 유뷰트에 들어가 검색을 하던 중 내면 아이 만나기라는 제목에 이끌려 듣게 되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방 불을 끄고 흰색의 작은 가짜 튤립 한 송이에서 주황색 따듯한 빛이 나오는 전등을 켜고 두툼한 방석에 앉았다. 두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며 가이드의 말을 따라갔다. 


 “천천히 걸어갑니다. 가다 보면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내면의 어린아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치유와 관련하여 강의하는 강사 분의 내면 아이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예 외면해버린 거다. 지인의 내면 아이는 너무 순하고 착해서 갖고 싶은 선물도 소박했고 선물을 주니 바로 웃었다고 했다. 나의 내면 아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함도 잠시 내면의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내면 아이는 말랐고 6살 정도로 돼 보였다. 머리카락은 단발보다 조금 더 짧았다. 아이의 눈빛은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이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이에게 이야기해주세요. 많이 외로웠지. 많이 슬펐구나. 많이 화가 났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니..”     


 나는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는 마음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정말 미안했다. 펑펑 울진 않았지만 약간의 눈물이 흘렀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많이 외로웠지. 화가 많이 났구나.’ 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근처에 있던 종이를 찢고 내던지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렀다. 강렬했던 내면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어린아이를 너무 오랜 시간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 상담도 받고 불교 공부도 하고 술도 줄이고 건강한 음식도 챙겨 먹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108배 수행을 빼먹는 날은 좀 있어도 명상은 하루 5, 10분이라도 꾸준히 하는 중이었다. 건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분노로 가득 찬 아이의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나의 내면을 돌보지 않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돌보는 중이기에 내면 아이가 표출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들여다보고 치유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아예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정 중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유독 어려워한다. 아이는 아마 참을 대로 참다가 터진 것 같았다. 어렸을 때는 크게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표현을 해야 덜 혼날지 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잘 울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주변에 누가 있으면 울고 싶어도 편히 울지 못했고 화도 잘 내지 못했다. 연습한다고 했지만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다. 나는 아이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도록 같이 종이를 찢었다.     


 며칠 뒤 두 번째로 아이를 만나러 갔을 때 아이는 경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화는 금방 누그러졌다. 내가 왜 다시 왔는지 아는 눈치였다. 아이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와 함께 낙엽 위를 뒹굴며 놀았던 장면, 따듯한 핫초코를 타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깨끗하고 은은한 조명이 있는 따듯한 방을 만들어주고 아이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슬픈 감정이 올라오거나 불안의 마음이 느껴질 때 호흡을 하면서 필요하면 내면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인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만난 내면 아이는 겨울이니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나가서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지고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손발이 꽁꽁 얼자 나는 아이와 함께 사우나에 가서 따듯하게 몸을 녹였다. 아이가 혼자 놀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를 눕히고 안정을 시켰다. 몸을 잘 말리고 편안하고 따듯한 옷을 입혀주었다.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다. 다행히 이상은 없다. 집에 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듯한 음식을 먹었다. 아이는 곧 침대에 가서 누웠다. 노곤노곤 졸음이 쏟아진다. 나도 아이 옆에 함께 누웠다.      


 어린 시절 나에겐 정말 이런 사람이 필요했다. 아프면 걱정해주고 세심하게 봐주고 나의 감정을 알아주고 편안하고 따듯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자립심 있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 위해 나만의 공간도 필요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무의식 속 내면 아이를 만나 그때 해주지 못했던 것을 해준다. 나는 이 아이의 보호자이자 친구다.      


 “앞으로도 언제나 너의 편이 되어주고 아껴주는 든든한 존재가 될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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