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무지가 만드는 혐오

누가 일반화를 허락했는가

by majestyy 언제나

인류는 오랫동안 농경사회를 이루며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왔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역시 생존을 위해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살아가던 가족을 해체하고 핵가족으로 1인 가구로 살아간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나를 돌아볼 여유도, 주변을 살필 의지도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고립시켜간다.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세대를 이해하고 보듬을 여유가 없다. 게다가 자기 PR의 시대라며 나의 목소리와 나의 채널, 나에 대한 어필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힘이 된다.


노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나도 노인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인은 곧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전혀 먼 존재라고 생각한다. 노인과 나의 삶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긴다. 미래의 노인인 내가 현재의 노인을 소외시킨다. 스스로도 소외되고 고립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마음 한 켠에 묻은 채.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더 이상 이타적인 삶을 위한 방정식이 아니다. 언제고 내가 타인이라 지칭했던 삶을 살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투자이며 학습이다.


노인 세대에 대한 혐오가 문제가 된다.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지만 한동안 아동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역시 극심했다.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주도하는 소위 ‘목소리 큰’ 세대의 생각은 순간순간 다른 세대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광화문에 나간 노인들에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칼날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무지몽매하여 답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철통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고통을 선사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노인들이 정말로 그렇게 철두철미한 계략(?)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강성파들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어쩌다 보니’ 그리 됐을 거다. 우리가 노인들을 그냥 그대로 놔뒀을 때, 어떤 세력들은 이용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을 가르쳐주기 귀찮아할 때, 그들은 나서서 가르쳐주며 자신들의 뜻을 담은 콘텐츠로 유도했다.


사실,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나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들도 한 집안의 어른이고 누군가의 부모일 텐데도 말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매스컴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모습을 일반화해 행하는 혐오는 옳지 않다.


100세를 바라보시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답답하고 가끔은 이기적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더 오랫동안 무병장수하시며 우리 곁에 계시길 바란다.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으려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오는 할머니도 이기적인 노인네가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계속 느끼는 점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아이의 성장과정에 대해 많이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아이를 낳기 전에 전혀 몰랐기에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편견과 공격이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적어도 엄마인 나는 그것을 느낀다.


나는 노인에 대한 편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노인들의 건강상태와 생활패턴, 사회생활 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정확히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의 욕구와 요구,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을 우리 나름대로 판단하고 끼워 맞추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노인들 역시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것을 편견과 공격이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방어하는 모습이 더 큰 혼란과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이기적인 아이도, 청년도, 장년도, 노인도 있다. 그 계층과 연령의 모든 이가 눈엣 가시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만나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이해하려 해야 한다. 자주 못 만나고 잘 모르니까 어쩌다 만난 ‘그런 사람’이 ‘모두’가 되어 버리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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