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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의 서랍 Aug 13. 2020

세입자의 서러움

이래서 다들 자기 집 사고 싶어 하나 봐



집주인이 지하실 새 입주자가 물이 샌다고 한다며, 우리 집 욕실을 좀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야 보여달라니 보여줄 수밖에 저녁에 집으로 와 보러 오라 하니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집주인 내외가 들어와 욕실을 보고 휴지를 제대로 따로 버려라는 둥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둥 하는 통에 금세 짜증이 났다. 


원래도 이렇게 집주인이 막 들어와도 되는 건지, 무척이나 기분이 나쁜 경험이었다. 그 일 외에도 집주인 내외와는 다툼이 많았다. 위층에서 아무리 쿵쾅 거려도 입 한번 뻥끗거린 일이 없었는데, 집주인 부부는 특히 그중에서 놀부를 닮은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를 볼 때마다, 마주칠 때마다 꼭 한 소리씩 쓴소리를 해서 노이로제가 걸릴 노릇이었다. 



그 집을 들어갈 때 아무래도 신혼집이고 그전에 있던 벽지가 워낙 알록달록 컬러풀해 마음에 들지 않아 흰 벽지를 도배를 하고 들어갔는데, 우리가 일언반구 한 적이 없음에도 한 번은 원래 세입자가 벽지 같은 건 하고 들어오는 거라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누가 묻지도 않았고, 돈을 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집 바닥은 틈이 벌어진 강판 마루(?) 같은 것으로 되어있었는데, 인테리어를 10여 년간 하신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틈으로 발암물질이나 먼지가 나오기 때문에 꼭 메워 줘야 한다면서 손수 며칠이 걸리도록  틈을 막아주셨다. 


한데 이도 주인 부부의 한소리 깜이 되어서 마주칠 때마다 왜 장판 사이사이를 메워주었냐, 그러면 장판이 숨을 쉴 수 없다면서 성화를 내었다. 그들은 인테리어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방에 거주하는 건 우리 부부였다. 그 집을 선택한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그 주인 부부를 만난 것도 소름 끼치게 싫다. 


심지어 그 집을 계약할 당시 시아버지가 부동산에서 계약금을 주고 계약서를 쓰셨는데, 그 당시에도 시비가 붙고 분위기가 안 좋아서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뻔했다고 하셨다. 그때 차라리 계약을 하지 않게 되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계약을 한 이후에도 다른 집이 더 마음에 들어 그 집이 나가면 다른 집을 계약하려고 여러 부동산에 다시 내놓기도 했지만,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결국 꾸역꾸역 2년간을 그 집에서 살았다. 



군자 집에는 주차장이 없고, 그나마 1대를 댈 수 있었지만 주인 아들 차를 대는 공간이었기에 우리는 차를 댈 곳이 없어 매번 도로 옆에 대다가 두세 달에 한 번은 딱지를 끊겨 벌금을 내야 했다. 

가까웠던 내 직장에 대기도 하고,  불법주차도 해보고, 주변 월주 차장도 알아보았지만 모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살던 곳은 1층에 두 곳의 가게가 있었는데, 하나는 김밥가게고, 하나는 미용실이었다. 미용실 옆으로 작은 외부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외부현관문이 있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미용실이 영업이 끝나는 10시 11시가 되면 미용실 옆에 차를 대었다. 그곳은 도로도 인도도 아닌 곳으로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 스폿이었다. 

하지만 미용실 주인과 트러블이 생겼다. 특히 토요일 낮이면 미용실에 오는 고객이 차를 대야 하기 때문에 차를 빼주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다시는 그곳에 차를 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일 수였다. 

보통 토요일 늦게까지 늦잠을 자는데 못해도 11시에는 차를 빼 주어야 하기 때문에 토요일 아침이면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깼다. 한 번은  평일 출근길이었는데, 7시 40분쯤 우리 현관문을 주인이 사정없이 두드리며 당장 나오라고 성화를 내었다. 

출근 준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나가보니 당장 차를 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차를 대지 말라고 또 으름장을 놓았다. 집 없는 설움이 북받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분명 그 집 건축물대장에는 주차공간은 2대였다. 

그 집은 2대 중 1대의 주차공간을 불법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도 그 집을 계약한 우리의 잘못 일론 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 주인 내외가 미용실 원장이 보통의 말씨와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면 그렇게까지 서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는 대역죄인도 아닌데 그 집에서는 그토록  갖은 핏박을 받고 살아야 했다. 

시부모님은 그럴 때 대응하지 말고, 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셔도 딱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미용실 원장과는 나중에 사이가 좋아져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주차를 할 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주셨다. 물론 낮 시간에는 차를 빼주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으로.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는데, 주말에는 군자역으로 놀러 온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차를 대는 통에 전화를 걸어 차를 빼 달라고 해야 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그 집에서의 안 좋은 기억의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그렇기에 새 집의 소중함이 더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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