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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단상
내 선과 내 선율을 그리려고
2023.5.6.
by
하얀밤
May 6. 2023
비 오는 휴일.
주방에서
씻을 그릇을 정리하고
옥수수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견과류를 집어 먹으며
몇 주 째 씨름 중인 물리학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들었다.
"엄마! 오늘 뭐 입지?" 하는
아들 목소리에
배드민턴 방과 후 수업 가는 아들 옷을 챙겨주고
아들이 허물처럼 벗고 간 실내복을 들고
세탁기를 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빗소리를 들었다.
예능 프로그램 볼륨을 높이고
컴퓨터로 옮겨가 게임을 하는
애들 아빠의 마우스 클릭소리를 들으며
물리학보다 중요한 건
무음마우스일까
생각하며
잠시 책을 덮고
빗소리를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요리에 관심이 많아진 딸이
주방에서 그릇을 꺼내고
냉장고를 여닫는다.
가족들 밥을 해주겠다며
냉동 볶음밥을 볶고
계란프라이를 한다.
지글지글 기름 소리가
빗소리와 닮았다.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아들이
볶음밥을 퍼먹고는
엄지 척을 날리고
딸은 그럴 줄 알았다며 뿌듯해한다.
집 안 어느 한 점을
차지한 사람들이
이어지는 빗소리처럼
각자의 행동을
선으로 이어나간다
.
나만 점 같다.
유달리 나만
뚝 뚝 끊어진 점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렇다.
나른하다고 해야 하나,
지루하다고 해야 하나,
조도(照度)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에게
오늘 같은 날의 집은
물속 같다.
사람들이 흘리는 각자의 선율 속에서
나 혼자 스타카토 같은 음처럼 지내다가
아, 오늘 같은 날들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크면 더 점처럼 살게 될 것 같은데.
아이들이 크면 더 스타카토 같은
음을 낼 것 같은데.
내 선을 그려야겠다.
내 선율을 내야겠다.
조도를 높여야겠다
.
그래서 집을 나왔다.
빗소리 속을 걸어서
집 앞 카페에 왔다.
읽던 책을 펼쳤다.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한
서울대 최무영 교수님 책은
많이 어렵다.
그래도 이 책을 쥐고 있는 순간
나는 내 선을 그리고
내 음을 낸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자랄수록
더 '내'가 되어야겠구나.
새삼 무서움증을 느꼈던
비 오는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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