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소년시대> 속 고딩이 노안인 이유

2024.1.4.

by 하얀밤



딸과 1일 1<소년시대>를 하며 지낸다.


언젠가부터 우리집 거실 TV에는 공기처럼 <소년시대>가 자연스레 재생되고 있다. 10화 밖에 되지 않아서 지금 몇 번째 다시 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문득 떠올려보니,

어느새 딸이 6학년에 올라가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5학년짜리를 보다 나의 국민학교 5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드라마 '소년시대'에 나오는 옛 물건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릴 기회가 많아서일까.




나는 국민학교 5학년 4월에 아빠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간다고 전학을 했었다. 전학 간 첫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낯선 운동장, 낯선 체육복, 낯선 종소리. 모든 게 낯설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혼자 지내면 심심할 것 같아 앞자리 아이를 쿡쿡 찔러 말을 걸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놀란 티를 내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실례라고 생각했다. 좁은 방 안을 비집고 자리잡은 어항 속 자라 두 마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나른한 방 안에서 자라는 나른하게 목을 빼곤 했다.


엄마가 하는 가게 2층에 속셈 학원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다녀서 나도 학교 다니듯 당연하게 다녔다. 학원에서 뭘 공부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교실도, 선생님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학원 마치고 아이들이랑 고무줄 뛰기 할 것만 기다리던 마음은 기억난다.


'소년시대'의 부여 소피마르소 같은 아이가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피아노 학원집 딸이었다. 이름도 세련되고 예뻤다. 그 아이랑 어쩌다 친해져서 그 애 집에 놀러 갔는데 자기 방이 있어서 너무 부러웠다. 방에는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피아노도 있었다. 엄마가 음대를 나왔다는 게 마치 동화 속 공주님 이야기 같았다.


애와 나는 우리반 반장을 같이 좋아했었다. 눈이 뱅글뱅글 도는 안경을 끼고 바가지 머리를 한 반장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둘이서 반장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나는 반장이 당연히 예쁜 내 친구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장은 공놀이만 좋아했다. 친구와 나는 괜히 반장을 놀리고, 안경을 빼앗아서 도망가곤 했다. 반장은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똘망똘망 다부진 남자아이도 꽤 인기가 있었다. 그 아이를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여자애들이 우르르 그 남자애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를 본 남자애가 집에서 나오다가 화들짝 놀라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열렸던 대문 틈으로 보이는 마당엔 샛노란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 애 엄마가 키우는 꽃인 것 같았다. 우리집에는 마당도 없는데, 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4월에 전학을 갔는데도 5학년을 마칠 때 즈음엔 마치 1학년부터 그 학교에 다닌 것처럼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아이들은 편견 없이 나를 대해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착한 아이들이다.


전학 전 학교의 친구와도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글자를 예쁘게 쓰던 그 아이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를 나에게 소포로 보내주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그 친구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명심보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좋아하던 수준의 나에게, 단단한 문고판 '세상을 보는 지혜'는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하는 책처럼 느껴졌다. 친구에게 답장으로 '너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긴장이 돼'라고 썼다가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답장을 받았다. 뜸해진 편지는 6학년이 되며 완전히 끊겼다.




딸과 산책을 하며 힐끔힐끔 딸을 쳐다보았다. 5학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딸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아무리 봐도 어린 꼬꼬마로만 보인다. 쫑알쫑알 떠드는데 온통 편의점 디저트 이야기이다.


"너희 반에 네 마음에 드는 애가 있니?"


뜬금없는 내 질문에 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있겠어?"


한다.

진짜 없을까? 몽글몽글하는 마음이 생길 시기인데.


"아, 어떤 남자애가 하는 말은 들었어. 누가 자기를 좋아한다나."

"그래?"

"그래서 '어쩔티비!'라 했어."

"아.."



'소년시대' 속 고딩은 다들 노안이다. 배우 중 한 명이 인터뷰에서 그랬다. 현대의 고딩 역할은 못하겠는데 1980년대 고딩은 할 수 있다고. 그 배우는 30대였다. 공감이 가서 웃었다. 옛날 학생들이 지금 학생들보다 성숙해서 얼굴도 노안이었을까. 마음이 성숙하니 얼굴도 더 성숙했을 것 같다. 내 국민학교 졸업앨범 속 아이들도 지금 아이들보다 노안들 같다.


'소년시대'에 쏙 빠진 우리 딸은 어떤 포인트가 마음에 들어서 저렇게나 또 보고 있을까. (18세 관람가를 아이에게 보여주냐고 하면... 흡연, 폭력 장면에 대한 지도를 하며 부모가 함께 보고 있으니 괜찮은 것으로ㅋ)

찌질이 븅태가 스스로 힘을 길러 우뚝 서는 스토리도 재밌고, 개그 요소도 배를 잡고 웃게 할 만큼 재밌지만, 아마도 잘생긴 주인공 임시완을 보고 있으리라. 나는 안다.

잘생긴 배우를 보면서 설레할 딸의 마음이 참 예쁘다. 그럴 때니까. 티를 안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른 척해준다.


엄마도 5학년 때 서태지 좋아했어.

엄마의 서태지가 너에게 없을 리가 없지.


마인크래프트로 6층집을 지었다고 자랑하는 아들은 공놀이만 좋아하던 우리반 반장 같다. 화들짝 놀라 대문을 닫고 들어가던 그 남자아이 같다. 저런 아들도 누군가를 보며 설레할 날이 오겠지.


아이들이 자라니 또 다른 포인트에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소년시대>는 오늘도 재밌다.




딸이 "저렇게 얼굴 쓸 거면 내 쌍둥이한테나 주지!"한 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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