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삶'을 살러 여행 간다

2024.1.7.

by 하얀밤


지난여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유럽 여행([여행 단상]여행은 삼대가 같이 하는 게 아니다)을 다녀오고 나니 통장 잔고는 바닥에 바닥을 찍었다. 때문에 가장 먼저 줄인 건 외식비와 배달음식비였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누군가든 무엇이든 나 대신할 수 있는 존재에게 일거리 하나라도 맡겨버리고 싶다. 가장 만만한 것이 음식이어서 외식과 배달에 자주 의존했다. 워킹맘 집은 엥겔지수가 높다는데 우리집이 딱 그랬다.


절약은 효과가 꽤 컸다. 한 달에 30만 원 이상 절약했다. 절약하는 습관이 배니, 식비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생각 없이 돈을 많이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딸과 함께 간 다이소에서 싸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집어 올리는 내 손, 잠시 들어간 올리브영에서 언젠가 쓸지 모른다며 만만해 보이는 클렌징폼을 집어 올리는 내 손을 의식하는 건 신선하면서도 씁쓸했다. 이런 소비도 의식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니 절약의 효과가 더 컸다.


한 두 푼 절약한다고 4인 가족 서유럽 여행비를 메꿀 수 있는 건 절대 아닌데, '절약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여행 욕심을 슬금슬금 끌어올렸다. 이번 겨울에 아무 데도 가지 않기로 하고 서유럽 여행을 강행했건만, 여행비는 계획하기 나름이라는 자기 합리화로 무장하고 또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현재로서 가장 싼 해외 여행지는 일본 후쿠오카다. 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인 가족이 배를 타고 가면 비행기보다 훨씬 저렴해진다. 15년 전, 오사카를 배로 갔다 오며 배 여행이 나한테 맞지 않는 걸 알고 다시는 배 타고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건 나한테 비밀이다. 사람은 여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오가는 교통편만 해결되면 체류비는 아주 싸게 나온다. 내가 숙박과 먹는 것에 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못 사는 집에서 자라서 그런가 나는 남들이 좋다는 호텔 입구만 가도 위축이 된다. 화려한 샹들리에나 조명도, 대접하는 직원도 너무 불편하고 송구스럽다. 어릴 때 못 살았던 사람도 어른이 되어 잘 다니는 걸 보면 못 살았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성향 탓인 것도 같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일본에 여행 가면 에어비앤비를 자주 이용한다. 교통 허브 구실을 하는 역 주변에 부대시설이 괜찮은 방을 구하고 거기서 거주하듯이 지낸다. 그렇게 지내면 호캉스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가 있다. 주택가 길을 걸어서 내 집에 온 듯 들어와 불을 켜고 신발을 벗고 익숙한 듯 외투를 벗어 걸 때의 기분이 얼마나 간질간질 좋은지 모른다.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해서 세탁기를 돌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군것질 거리를 식탁에 펼쳐 놓고 먹으며 TV를 볼 때는, 이걸 하려고 여행 왔나 싶을 정도로 좋다.


나에게 여행은 그곳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호텔에는 삶이 없다. 휴양지에는 삶이 없다. 내 집에,내 출퇴근 길에, 우리 동네길에 삶이 있듯이 외국도 그렇다. 짧은 기간이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삶에 푸욱 들어가 보면 다시 태어나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렇게 며칠 지내면 사람 사는 게 어딜가든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한 위로가 또 없다.


코로나 직전에 갔던 방콕에서도 그랬다. 유명한 휴양지는 전혀 가지 않았다. 지인을 통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저렴한 호텔에 머물면서, 혀를 빼고 하루 종일 손풍기를 틀어도 모자랄 더위에 방콕 구석구석을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BTS라는 설레는 이름을 가진 전철을 타고, 수상 버스를 타고, 툭툭이를 타고 모세 혈관을 훑듯 방콕을 훑었다. 긴 팔을 입고 공사장에서 철근을 나르던 사람의 땀방울이, 룸피니 공원에서 도마뱀 있는 곳을 손짓 발짓으로 알려주던 노부부의 웃음이, 바가지를 씌우려다 실패한 툭툭이 기사의 표정이 모두 삶의 일부였다.


일본 후쿠오카 여행을 계획 중이라 하니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온천에 가라고 한다. '겨울, 일본'하면 온천이라는 공식이 나한테는 없다. 이번에도 '삶'을 살러 간다. 나는 후쿠오카가 두 번째여서 후쿠오카 시내 분위기는 대충 알지만 아이들은 처음이라 유명한 관광지를 먼저 계획에 넣고, 추가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를 알아 보고 있다.


소도시에 가면 정처 없이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차 한 잔 하고 싶으면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실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할 빵이나 케익이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서점이 보이면 들어가 책 구경을 하고, 말을 잘 걸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도란도란 이야기도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다니면 크게 돈 들 일이 없다. 환전한 돈이 남아서 몇 년 뒤 다시 여행 가서 쓰는 일도 많았다. 요즘은 트래블로그 카드 같은 게 있어서 이 부분도 해결되어 점점 여행하기 좋아지고 있다.


역에서 내려 걸을 길을 구글맵으로 살펴보았다. 학교도 있고, 작은 가게도 있다. 직접 걸어보면 앙증맞게 솟은 풀과 담벼락 넘어 고개 내민 나무도 만날 수 있을 거다.

이런 여행에 익숙해져서 하루 2만 보 걷는 게 여행인 줄 아는 아이들에게, 우연히 지나가는 길가에 낮잠 자는 고양이가 선물처럼 나타나면 바랄 것이 없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년시대> 속 고딩이 노안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