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펜소리만 들리던 야자시간.
수학 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날 툭툭 치며 네가 물었었지.
넌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답해야 했을까. 왜 나는 네 눈만 바라만 보고 입을 떼지 못했을까. 뜨는 해를 보며 등교하고 별을 보며 하교하는 삶에 의미를 두려면 멋들어진 답을 찾아야 했는데. 아무리 답을 떠올려봐도 '대학합격'이라는 네 글자만 떠오르더란 말이지. 내가 누군지, 어떤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비소로 의문을 품고 질문을 하는 시기가 사춘기라고 하던데 나는 사춘기가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나 봐. 사춘기도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던 걸까.
나는 분명 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었고,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힘들었어. 게임 속 NPC에게 질문을 하면 정해진 답밖에 못하는 것처럼 내 머릿속엔 정해진 답들만 맴돌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인간이긴 했는지 네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끼긴 했어. 딱 거기까지였지. 나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은, 없었어.
당연해 보이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어떻게 기르는 거지? 왜 나는 프로그래밍된 NPC처럼 공부하는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와, 좋은 대학이 내가 원하는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걸까.
아니,
나는 내게 인생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어. ‘삶’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내게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나라는 사람은 그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 시간이 강물처럼 흐른다면 그 위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방향과 속도에 그저 몸을 맡기는 존재로 받아들였지. 내 손으로 노를 저어 속도를 조절하거나, 배의 방향을 바꾸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그러니까 열아홉의 나는 오로지 세상이 원하는 바, 즉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고, 고3이었기에 더더욱 그 역할에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었어.
그런 열아홉 살이었어.
공부의 의미 따위 알 게 뭐야, 같은 반항 어린 생각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숫자로 환산되는 성적이 인생의 전부였던 내게 주변의 아이들은 전교 석차 리스트의 한 줄로만 보였어. 상위권에 있는 아이들은 눈빛으로 서로를 경계했지. 내가 고1 때 우리 반 반장 이야기해 준 거 기억나니? 주말에 학교에 나와서 공부하는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 애. 왜 주말에 놀지 않고 공부하냐는 둥 빈정거리다가 묻지도 않은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 스케줄을 읊고는 사라졌다던 그 애. 그때는 그 애한테 화만 났는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걔도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흔한 상위권 아이 중 하나였구나 싶어. 나를 보려고 굳이 주말에 학교까지 왔었으니까. 내가 푸는 문제집을 힐끔 쳐다보던 그 애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해.
안타깝고 씁쓸한 기억이지.
평화로워 보이던 우리 고3 교실에도 팽팽한 긴장의 끈이 여럿 있었어. 우리 옆 분단에 앉았던 정미 기억나니. 바싹 마른 몸에 얼굴이 하얗던 애 말이야. 그 애의 웃음 사이 스치던 날카로운 눈빛을 너는 모르지. 정미의 시선은 내 책상을 향하고 있었어. 몰래 내 서랍과 사물함을 뒤지기도 했어. 나는 다 알고 있었어. 모른 척했을 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아무리 나를 힐끔거려도 정미는 실력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걔에겐 내가 곧 따라잡을 수 있는 경쟁자처럼 보였겠지만 나에겐 아니었어. 내가 힐끔거려야 하는 아이는 따로 있었으니.
재미있지 않니?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나 하며 시시덕거리는 줄만 알았던 아이들 사이에 오고 가던 그 경계심들이. 그 경쟁심들이.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성적으로 진학이 결정되는 교육 환경 속에선 피치 못할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위안해야 할까.
앞선 내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냐는 너의 질문에 늦게나마 답이 됐을까? 내가 열심히 공부를 했던 이유는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결국은 경쟁심, 지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어. 어른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 직장이 왜 좋은지는 궁금하지도 않았지. 어른들이 ‘좋다’ 하니 ‘좋은’ 것이라 무조건 믿었던 거야.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비판의식 없이 어른들 말에 고분고분 잘 따르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질까지 갖춘 나에겐 최적의 제도였어.
- 지기 싫은 아이(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