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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Oct 13. 2024

나를 모르는 곳으로(1)


아침.
창을 여니 가을 내를 품은 공기가 방 안으로 훅 밀고 들어왔어. 가실 줄 모르던 무더위도 결국 지나고 가을이 왔어. 너무 그리웠어. 이 가을 내가.

오늘처럼 선선했던 그때.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웃는 게 사춘기라는데 중학교 3학년 가을 무렵, 난 고민이 많았어. 자신이 누구이고 왜 사는지를 고민하는 게 사춘기라 하니 어쩌면 사춘기다운 사춘기를 보냈는지도 모르겠어. 가을 내내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니까.

요즘 말로 ‘인싸’가 되고 싶었던 나는 '인싸가 되고 싶었던 아이’로만 남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 결국 인싸가 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뜻하는 ‘아싸’가 될까 봐.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으로, 죽어도 ‘아싸’만은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어느 날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하는 친구가 시큰둥하게 말했어.
“너는 왜 내가 하는 말 끝마다 ‘나도’를 붙이니.”
“내가 그랬나. 미안해.”
사과부터 하고 친구가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어. 친구가 어떤 말을 했더라, 문방구에서는 어떤 말을 했더라, 걔가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더라. 신호등을 건널 때 걔 표정이 어땠더라. 생각의 꼬리는 이불속까지, 꿈속까지 따라붙었지.
‘나도’라는 말을 많이 썼다는 건 인정할 수 있었어. 그렇지만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내 생각과 비슷했기 때문에 했던 말인데 그게 기분 나빴다니.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어.
잘게 찢은 잡지처럼 조각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어. 휘날리는 조각들의 어디가,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 친구가 서운함을 느낀 순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답답해 미칠 것 같았어.
그날 이후로 그 애는 평소처럼 잘 웃지도 따뜻하게 날 바라보지도 않았어. 어떻게든 예전의 관계로 되돌리고 싶어서 친구의 비위를 맞추려고 칭찬도 해보고 걔가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도 해봤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 딱 그랬을까. 이 이야기 다음엔 무슨 이야기를 할까를 고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
그만두고 싶었어.
그런 관계.

학교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는 친구와의 불화는 불안의 씨앗이 되고 불안은 점점 커져서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도 스멀스멀 스며들었어. 무거운 기운이 바윗돌처럼 가슴 한가운데를 짓눌러서 자주 체했어. 하지만 그 모든 건 나만 알았지. 겉으론 항상 밝고 명랑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부족하거나 초라해 보이는 건 내가 스스로에게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늦가을, 우리집은 이사를 했어.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면 나보다 먼저 화장실을 떡 하니 지키고 있던 곱등이와도 안녕이었지. 해충 박물관 같았던 주택에서 탈출해서 너무 좋았어.
우리집은 동네에서 꽤 괜찮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 그 있잖아. 동네마다 저기 살면 괜찮다고 여기는 아파트.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 돈이 났는지 모르겠네. 그때부터 아빠의 아픔이 시작됐는지도.
지금은 내 중3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아빠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게.

새로 이사 간 우리집은 복도식 아파트의 15층이었어. 현관문을 열면 시선이 하늘에 맞닿아 있었어. 발아래 펼쳐진 동네는 무사태평해 보였어. 우여곡절 많은 학교도, 매일 다니는 길도 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어. 한 가지 마음이 쓰였던 던 옆집에 살던 희영이였지. 중2 때 같은 반이었던 희영이는 친하지는 않아도 인사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였어. 현관문을 열다가, 복도를 지나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희영이와 마주치곤 했어. 우린 ‘안녕’하고 말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지.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희영이가 말했어.
“너 이사 안 가냐?”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넘어가는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말속에 녹아있는 날카로움에 놀라 바보같이 얼버무리고 말았어.
“이사. 아직 안 갈 거 같은데.”
내 말을 들은 희영이는
“빨리 이사 가면 좋겠네.”
하고는 나보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앞서 걸어갔어.

그날 저녁 내가 얼마나 이불을 차댔을까. 네가 뭔데, 네가 이 이파트 주인이냐. 우리 엄마 아빠가 정정당당하게 돈 지불하고 들어왔는데 내가 들어오든 나가든 네가 뭔 상관이냐. 싸가지 없는 게, 얼굴도 못 생긴 게. 너나 나가라. 나쁜 계집애.
며칠 밤을 이불속에서 외쳐댔어. 희영이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막상 마주쳤을 땐 아무 말도 못 할 거니까. 좋은 아파트에 먼저 들어와 살았던 희영이가 이 아파트의 진짜 주인이고 나중에 이사 들어간 나는 그 애의 삶을 흉내 내는 가짜 같았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런 비논리적인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렸어.

다 지긋지긋했어.
등하교하는 친구도, 옆집의 희영이도, 우리 반 애들도, 우리 반이었던 애들도. 한바탕 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억지로 웃고만 있는 내가 너무 멍청해 보여서 내가 나를 자꾸 꾸짖었어. 억지로 밝은 기운을 짜내는 것보다 나에게 혼나는 게 너무 힘들었어.
우리집에, 내 방 안에, 내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멍하니 시간이 늘었지. 가장 행복한 시간은 자기 전에 누워 머리맡에 라디오를 켜 두고 몸을 웅크릴 때였어.
그즈음 매일 밤 10시마다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가 그만두었고 마지막 방송 날 디제이는 울먹이며 말했지.
“마지막이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말 걸 그랬어요.”
나도 같이 울었어.



-나를 모르는 곳으로(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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