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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Oct 06. 2024

얇은 담요의 밤(2)


다음날 아침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이 편지를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됐어. 분명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짐을 챙겼겠지. 잊고 싶은 아침이었겠지.

기억은 모두 첫날밤에 한정되어 있어. 보배와 현서는 나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어. 단지 날 바라보지 않고 말을 걸어주지 않은 것뿐인데 내 마음은 엄마에게 맞았을 때 순식간에 빨갛게 부풀어 오르던 살보다 더 아팠어.


그날 이후로,

난 나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어. 보배와 현서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생각하면 학교 가기가 싫었어. 내가 웃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숨어서 손가락질할 것 같았지. 침낭도 없이 얇은 담요 하나 들고 온 바보 같은 애라고, 추울 게 뻔했는데 안 추운 척하며 오들오들 떨며 잤던 애라고, 무시해도 괜찮은 애라고. 둘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뒷골이 서늘했어.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치부를 손에 쥔 둘이 너무 무서웠어.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워져서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어. 50명이 넘는 우리 반 애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인사를 하고,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해댔지. 어디선가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어제 본 텔레비전에 나왔던 개그맨의 대사,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인 듯 만들어버린 모험담을 늘어놨어. 재미있다고 손뼉 치는 아이도 있었고 슬금슬금 피하는 애도 있었어. 하굣길엔 슬금슬금 피하던 애들 눈동자만 떠올랐어. 그 눈동자는 이불속까지 따라 들어왔지. 눈을 감아도 눈앞에 떠돌았지. 그 눈동자는 내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


3학년이 되어 내가 보배만큼 커버렸을 때, 현서보다도 더 커버렸던 때 나는 지쳐있었어. 모두에게 웃어주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거든. 제풀에 못 이겨 일찌감치 그 짓을 그만둔 뒤였지. 그래도 괜찮았어. 여전히 내 옆엔 등하교를 같이 하는 친구가 있었고,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그 애들과 있으면 학교 화단에 있는 왕거미도 지렁이도 예뻐 보였어. 친구들과 함께 있는 나도 분명 예뻐 보였을 거야,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렇게 따돌림을 이겨냈어.

홑담요를 덮고 추위에 떨던 열다섯의 나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쓰라려. 이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이 감정이 씻은 듯 사라지기를 바라지도 않아. 중요한 건 어린 나이의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다는 걸 기억하는 거야.


이겨내는 시간 동안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방법으로 위태로운 때도 분명 있었을 거야. 도중에 포기했다면  여전히 그날을 곱씹고 있겠지. 아픔은 덧셈이 아닌 제곱으로 커졌을 테고 복수심은 복리 이자처럼 불어났을 거야. 몸만 커버린 채 열다섯에 머물며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보배들과 현서들에게 보배와 현서의 가면을 씌우고 무지개 담요를 덮던 밤을 몇 번이고 재현했겠지.


너무 끔찍하지.


나는 그 끔찍함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났어. 엄마, 아빠, 선생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었어. 늪에서 나오는 법은 누워서 두 발을 젓는 거라 하지. 나는 늪에서 나오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단 거야. 운도 따랐겠지. 하지만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맞아. 희수야. 나는 나를 칭찬하고 있어.

나를 추앙하고 있어.

나는 아픔을 이겨낸 나를 인정함으로써 더 강해지고 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겠지. 눈에 띄던 희수가 반 아이들에게 받았던 눈빛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억지웃음을 유발하던 내가 받았던 눈빛을 마주하고 있겠지. 예리한 칼날처럼 피부를 베고 마음을 베던 그 눈빛. 괜찮은 척 무시하거나 웃어넘기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는지. 그 아픔을 느끼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어. 희수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어.

당신에겐 남과 다른 독특함이 있어서 남들과 다른 빛이 나는 거라고. 그러니 백안시하는 사람들에 지지 말라고.

그 독특함을 지켜내는 것이 당신을 살릴 거라고.


나를 살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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