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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Sep 29. 2024

얇은 담요의 밤(1)


곱은 손을 모아 쥐던 그날 새벽. 운동장 바닥의 크고 작은 돌멩이가 느껴지는 바닥을 손으로 쓸었지. 토돌토돌한 바닥에 닿은 등이 시려 옆으로 돌아누웠던 밤. 내 키보다 작던 무지개 홑담요 속으로 몸을 말아 넣었던 밤. 여름밤의 서늘함을 실감하게 하던 시린 발가락. 등 뒤의  소곤거림. 따뜻한 온기를 즐기던 둘의 나긋하고 나른하던 그 읊조림.

“쟤 춥겠다.”

“그러게”


입술이 달달거렸지만, 몸이 오들오들 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는 척을 했어. 달리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나는 춥지 않아, 나는 잘 잘 수 있어. 이미 잠든 것 같지, 라고. 어서 그렇게 알아달라고. 내가 줄 수 있는 메시지가 그 외에 뭐가 있었겠어. 춥다고 해도 그들이 온기를 나눠주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추워서 쉽사리 잠들지 못했지만.


그날은 중학교 간부수련회 날이었어. 나는 2학년 8반 부반장이었고, 우리 반엔 부반장이 나 말고 하나 더 있었어. 반마다 반장 한 명, 부반장 두 명씩이 있었지. 반장 보배는 또래보다 키가 컸고 공부도 잘했어. 아이들이 그랬어. 보배를 이기면 전교 1등이라고. 보배는 대학가에서 옷을 산다고. 2학년 첫날 만난 보배는 소문대로 대학생 언니처럼 키가 컸고 공부도 잘했어.

나와 같은 부반장이었던 현서는 보배처럼 키가 컸어. 소풍 땐 보배처럼 대학생 언니처럼 옷을 입고 왔었지. 나는 그 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았어.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둘 옆에 서면 초등학생처럼 작아 보였어. 둘은 자리도 짝이어서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같이 있었어.

전교학생회의가 있는 날이면 나란히 걷는 둘을 따라 두 세 걸음 떨어져 걸었어. 나란히 걸어도 어느새 두 세 걸음씩 차이가 났어. 뭐, 상관없었지. 반장과 부반장이 단짝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부반장 역할을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으니까. 나한테도 등하교하거나 특별실을 갈 때 함께 할 친구 정도는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괜찮았었어.

간부수련회가 있기 전까지는.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1박을 한다는 간부 수련회는 각 학년의 숫자가 같은 반끼리 한 조를 이뤄서 진행됐어. 나는 2학년 8반이었으니까 1학년 8반과 3학년 8반과 같은 조였지. 학년이 다르니 서로가 낯설어서 자연스레 1학년은 1학년끼리, 3학년은 3학년끼리 붙어 있었어. 나도 보배와 현서 주변에 있었지. 둘은 나를 필요할 때만 불렀고, 필요할 때라는 게 그리 자주 있지는 않았어.

석식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자 선생님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웠어. 모닥불을 향해 앉은 보배와 현서는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듯했어. 나는 들렸지만 들리지 않는 척했어. 둘도 내게 들리지 않는 양 이야기했어.


내가 ‘척하고’ 있어야 했던 이유?

내가 둘과 함께 하지 못한 이유?

이유가 있을까, 희수야.

이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물을 수 없었어. 너희 둘 왜 나만 빼고 이야기하냐고, 왜 나를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대하냐고, 왜 나를 없는 사람인양 여기냐고.

나라고 묻고 싶지 않았을까. 해가 지고 별이 뜨고 풀벌레가 우는 내내 수 백 번 수 천 번을 묻고 싶었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물음을 수도 없이 눌렀어.


해가 지니 꽤 시원해졌어. 나는 처음 알았어. 밖에서 맞는 여름밤이 그렇게나 서늘하다는 걸. 밖에서 텐트를 치고 자봤어야 말이지. 보배가 가져온 텐트는 네 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크기였어. 취침 시간이 되자 보배와 현서가 텐트 안쪽을 차지했어. 나는 그 둘과 한 사람 분의 공간을 띄우고 입구 쪽에 누웠지.

뾰족한 자갈 하나가 얆은 은박 돗자리를 뚫고 나올 듯 옆구리를 꼭꼭 찔러대서 손짐작으로 자갈을 조심스레 밀어냈어. 최대한 덜 움직이면서. 하필 내가 누운 자리에 자갈이 있다는 걸 걔네가 몰랐으면 했어. 이미 보잘것없는 내가 더 보잘 것 없어 보일 것 같아서.

내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어.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걔네가 하는 행태가 따돌림이라는 나쁜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머리와 가슴은 따로였어. 가슴은 자꾸 울컥울컥 울음을 쏟아내려고 했어. 그래도 절대 울 수 없었지. 결코 걔네 앞에서만은 죽는 한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어.


야외에서 취침할 때는 침낭이라는 걸 사용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 우리집은 캠핑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영화에서만 봤던, 사람이 번데기처럼 쏘옥 들어가 잘 수 있는 이불 같은 게 내 주변에도 있는지 몰랐어. 2인용 침낭을 가져온 현서는 보배와 꼬옥 붙어서 누웠어. 둘은 밤이 늦도록 조용히 재잘거렸지.

끊임없이 울어재끼는 여름밤의 풀벌레들처럼.



-얇은 담요의 밤(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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